카네키 저택의 괴사건
#0
실패자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인간 군상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실패의 고통에 나아가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머무르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그 패배를 발판삼아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이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 두 부류 중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 이가 여기 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체스 신동으로 불린 사람이다. 모두가 그 능력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자식이 법조인의 길을 가길 바랐던 그의 아버지도 조금은 눈 감아줄 정도의 재능이었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점점 성적이 떨어지더니, 그는 아주 평범한 체스기사 중 하나가 되었다. 체스를 그만 두고 공부를 시작해도 별 문제는 없었으나, 그는 이미 작은 판 안에서 부딪히는 경쟁과 스릴의 맛을 봐 버린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인정이든, 법조인의 성공가도든 무척이나 부족하고 아쉬운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길을 가게 된 것은 평범하고도 착실한 대학 생활의 마지막을 보내던 22살의 여름.
“…아, 재밌는 일 없나.”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25살의 히이라기 하이든은 무척이나 권태로운 얼굴로 가죽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1
어깨보다 조금 짧은 기장의 반묶음 머리는 별빛처럼 아름다운 은발, 국적의 흔적이라도 남겨놓은 것 같은 칠흑 같은 브릿지로 구성되었다. 찰나의 브릿지와 같은 색의 검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덤덤했고, 일본인 평균보다 20cm는 더 큰 키와 약간 이국적이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히이라기 하이든의 외형은 누가 봐도 완벽한 사람이다. 무표정이기만 했어도 약간 차가운 매력을 발산했을 그였으나, 그는 누가 봐도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을 한 채 거의 흘러내리다시피 의자에 늘어져, 그의 매력을 십분 깎아먹는 중이었다. 사실 그가 상당히 도파민이 있을 법한 일을 해결하고 돌아온 것은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독할 정도로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는 하이든은 그 짧은 고요함이 무척이나 싫었다. 금방이라도 졸음이 쏟아질 것처럼 지루한 상황에서 하이든의 자세를 바로 하게 만든 것은,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였다.
“계세요?”
“예, 무슨 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하이든은 멈칫하고는 들어온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사람의 머리는 붉었다. 지나칠 정도로 붉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눈동자가 잠시 방을 둘러보더니 하이든에게 꽂혔다. 그러고는 아주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이든을 이 자리까지 이끌어준, 그 사람과 아주 닮은 얼굴이었다.
“…렌?”
“아, 계셨구나. 안녕하세요!”
그 순간 귀에 꽂히는 하이톤의 목소리에 하이든은 정신을 차렸다. 들어온 사람은 인근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제법 긴 머리를 한 채 하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하이든은 들어온 이가 여학생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
“히이라기 하이든 씨, 맞으시죠?”
“…예. 히이라기 하이든입니다. 맞지만, 먼저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닌지?”
하이든은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여학생은 그게 악수의 제스쳐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자기도 자연스레 오른손을 내밀어 짧게 악수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즈키 레이야라고 합니다. 저는 스이카 고등학교 2학년이고….”
“키사라기 고등학교 2학년이군. 부활동은 밴드부. 일렉기타인가? 아마 중학생 때부터 했겠지.”
“엇….”
본인을 하즈키라고 소개한 여학생이 놀란 얼굴을 했지만, 하이든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상대의 정보를 읊어갔다.
“집에 들렀고, 부활동 불참은 허락받은 모양이네. 딱히 사건을 가져온 것 같진 않은데.”
“…어떻게 아세요?”
하즈키가 조금은 의심이 어린 눈빛으로 하이든을 쳐다보자, 하이든은 무표정으로 하즈키의 손을 놓은 뒤 허벅지에 손을 쓱 닦고는 뒤로 돌아 무언가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교복이 빳빳하고 새것인 데에 비해 학년을 나타내는 리본은 좀 낡았어. 아마 올해 들어온 신입생 컬러에 맞춘 교복만 팔아서 그거라도 산 거겠지. 낡은 건 친구에게 빌렸거나 중고로 구매했을 거고. 학년까지 거짓말했다면 신입생 거를 전부 다 구매했겠지만, 리본은 굳이 낡은 것을 착용해가면서 2학년으로 맞춘 걸 보면 2학년은 사실이라는 뜻이겠지.”
“키사라기 고교인 거는요?”
“약간 땀이 난 걸로 보면 너는 도보로 이동했지만, 인근 학교와의 거리 등 여러 요소와 지금 시각을 보면 너는 그리 오랜 시간 이동한 건 아니야. 도보 시간이 짧은 인근 고등학교는 스이카, 키사라기, 호네로인데 호네로는 오늘 재량휴업일이었으니 키사라기지. 거주지도 이 근처일테고.”
“…네.”
하즈키가 별 말없이 하이든의 추론에 대해 동의하자, 하이든은 다른 특성에 대한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리고 기타. 오른손을 자연스럽게 내민 것을 보면 오른손잡이가 맞지만, 왼쪽 손톱이 잘 정리되어 있어. 오른손잡이가 기타를 칠 때에는 왼손으로 현을 짚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고, 왼손가락에 보이는 굳은살이 그걸 증명해주지. 어쿠스틱이라면 오른손에도 굳은살이 비슷하게 있을 법한데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보면, 피크를 주로 쓰는 일렉이라는 거고. 굳은살의 정도를 보면 연주한지 꽤 된 것 같으니.”
“하지만 바이올린같은 악기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악기는 한쪽 손만 정리하지 않아. 그리고 스이카 고교라면 몰라도 키사라기 고교에는 관현악부가 없어. 그쪽 특기생을 위한 제도도 없고.”
“집에 다녀온 건 어떻게 아셨어요?”
“키사라기 고교는 교복을 제법 강하게 단속하는 편이지. 하지만 가방이 등교용 가방도 아니고, 신발도 학교 등교용 구두가 아니야. 거기에 지금 시각은 키사라기 고등학교가 끝나고 좀 지났지만, 그렇다고 부활동이 마무리될만한 시간은 아니거든. 추측이긴 했지만 네가 맞다고 했으니, 인근의 집에 다녀온 거겠지. 여기 들어오면서 얼굴에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누군가에게 들켜도 걱정이 될 일은 없다는 거겠고, 뭔가 사건이 있다기엔 우환이 있어 보이지도 않으니 찾아온 이유는 제3의 문제야.”
무언가 발견한 하이든은 다시 뒤로 돌아 책상 위에 발견한 것을 내려놓았다. 하즈키는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읽었다. 의뢰서, 라고 적힌 A4용지 크기의 무언가였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가 뭐지?”
하이든은 책상을 강하게 내려치며 하즈키를 노려보듯이 물었다.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 하이든 본인도 속으로는 움찔할 정도의 소리였지만, 하즈키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평온한 얼굴로 책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틀렸어요.”
“뭐가?”
“일렉 기타를 연주하는 건 맞는데, 부활동이 아니거든요. 그래도 다른 건 다 맞추셨어요. 정말 대단한데요? 일부러 학교를 속인 건 조금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라 봐주세요. 예. 제대로 소개하자면, 저는 17살, 키사라기 고교 2학년 하즈키 레이야라고 해요.”
그렇게 말하고 하즈키는 고개를 약간만 돌려 하이든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입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하이든은 알 수 없었으나, 푸른색이 섞인 그 붉은 눈이 매서울 정도로 하이든을 쳐다보았다. 하즈키는 곧 고개를 온전히 돌려 하이든을 빤히 바라보았다. 선명하고 자신감 넘치는 익숙한 미소가 하이든과 마주하자, 하이든은 마음 한 구석이 무척이나 아려왔다.
“일본의 에르퀼 푸아로, 하야카와 탐정 사무소의 히이라기 하이든!! 당신의 조수가 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2
“돌아가.”
“예? 왜요!”
하즈키의 자신만만한 선언과 달리, 하이든은 가죽의자에 앉은 채 금방이라도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하즈키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혼자가 편해.”
“그러니까 성질 더럽다는 악명이 계속 재생산되는 거잖아요. 극심한 결벽증에, 우쭐대는 성격. 악명 때문에 오던 사람도 간다고 들었는데, 저 같은 미소녀를 조수로 데리고 있으면 그 악명도 좀 사그라들지 않을까요?”
“원조교제 오해 안 받으면 다행이겠다.”
하즈키의 불만이 섞인 대꾸에 하이든은 실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하즈키는 짜증이라도 난 듯이 한쪽 발을 구르며 열심히 반박했다.
“아니, 그래도! 조수가 있으면 증거도 대신 들고 다니라 할 수 있고! 증언도 정리하기 더 쉽고!”
“아동 학대야.”
“알바비 안 받을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지만, 노동청에 신고 당하는 소리 하지 마라.”
모든 의견이 반박당하자, 하즈키는 분하다는 듯이 양손을 꽉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금방이라도 피가 날 것처럼 강하게 쥔 손을 바라본 하이든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가죽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꼰 다리에 깍지 낀 양손을 올렸다.
“미안한데, 나는 누군가를 고용할 재정은 아니야. 먹고 살고 내가 즐길 정도로만 벌고, 그 이상은 딱히 벌지 않지.”
“생각보다 검소하시네요.”
“누구에게 검소를 배워서.”
하즈키의 말에 하이든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조금은 가벼운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누가 봐도 어린 티가 나는 얼굴에는 오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아무튼 돌아가. 네가 돈을 내고 조수를 할 생각은 없잖아? 고등학교 2학년이 무슨 돈이 있다고….”
“있는데요.”
“뭐?”
하이든이 하즈키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하이든의 바로 앞 책상에 제법 두툼한 돈뭉치가 하나 떨어졌다. 돈뭉치를 이루는 지폐 하나의 액수를 보고 하이든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하즈키는 제법 의기양양한 듯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수강료라고 하죠.”
“내, 내가 애 돈을 받아서….”
하이든이 먹고 살고 즐길 정도로 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먹고 사는 것에만 지장이 없을 정도라는 표현이 조금 더 맞을 터였다. 그러나 하이든의 스승의 말이 머리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아무리 궁해도 어린 아이의 돈을 받는 것은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니라는, 아주 정석적이고 올곧은 발언.
“더 줘요?”
하즈키의 어쩐지 시큰둥한 말투와 함께 새롭게 가방에서 꺼내 든 돈뭉치에 하이든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1년 동안 홀로 독립하여 사무소를 꾸려가는 하이든이 깨달은 것은, 일단 돈은 얻을 수 있을 때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의 돈을 받으면 어떤가, 어차피 자신은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니니 말이다.
“…이제 보니 조수가 필요한 것 같네.”
“그런 것 같네요.”
하이든의 대답에 하즈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하이든이 내민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깔끔한 체크메이트였다.
#3
“하즈키 왔어요!”
하즈키는 처음 봤을 때와 달리 키사라기 고교의 교복을 입은 채 탐정사무소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충격으로 인해 쉴 새 없이 딸랑거리는 종소리에 하이든은 잘못된 선택에 대한 직감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돈은 이미 받았고, 하즈키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이든이 불러서 온 것이다.
“그래… 왔구나.”
하이든은 조금 떫은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나고는, 한쪽 옷걸이에 걸려있던 하얀 트렌치 코트를 입으며 말했다.
“가자, 의뢰가 들어왔으니까.”
“의뢰요? 무슨 의뢰? 혹시 살인 사건?”
“이제는 그런 의뢰 안 받아. 우연히 휘말렸다면 모를까…. 이번에 들어온 의뢰 내용은 절도야.”
어느새 코트를 다 입은 하이든은 책상 위에 올려둔 갈색 서류 하나를 하즈키에게 던졌다. 용케 서류철을 받은 하즈키는 서류를 펼쳐 의뢰서를 조금 읽더니,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하이든에게 물었다.
“미나토 구? 여기 부자 동네잖아요.”
“그래, 선금도 많이 주더라.”
“…원래 그렇게 돈을 밝혔어요?”
“너도 쪼들리며 살면 알게 될 거다.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한다. 따라와.”
하이든은 하즈키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며 문을 나섰다가, 이상한 느낌에 문 안으로 고개만 넣어 사무소 안을 바라보았다. 하즈키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하이든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꼬라봐?”
“나는 조수인 거지 부하가 아닌데요.”
“그게 그거….”
“뭐라고요?”
“하… 청소년 다루기 힘드네.”
날 선 하즈키의 대꾸에 하이든은 한숨을 쉬며 조금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속으로 몇 번이고 염불을 외고 나서야 눈을 뜬 하이든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아주 약간이나마 다정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그래, 의뢰를 받았으니 이제 가볼까?”
“어우… 왜 저래.”
누가 봐도 극혐이라는 얼굴로 말하는 하즈키에, 하이든은 마찬가지로 표정관리를 하지 못한 채 살벌한 눈으로 하즈키를 쳐다보았다.
“좋게 해줘도 지….”
“예예. 가요, 가. 하즈키 같은 미소녀가 함께하면 분위기도 풀릴 거라고요~.”
하즈키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순식간에 해맑은 얼굴로 웃으며 하이든을 유유하게 지나쳐갔다. 하이든은 그런 하즈키를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아?”
“방금 봤잖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 하즈키의 뒷모습에, 하이든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생긴 건 똑닮았는데 하는 건 영….”
“뭐라고요?! 제 욕 한 거 아니죠?!”
“귀도 좋네… 아무것도 아니다….”
이미 계단 입구에서 소리를 지르는 하즈키를 바라보며, 하이든은 누군가와 같이 내려갔던 계단을 홀로 걸어내려갔다.
#4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의뢰인의 집은 누가 봐도 돈이 많은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하이든은 그 집의 모습에 어떠한 감상에 젖었다.
“표정이 왜 그러세요?”
“나도 저런 집에서 살 때가 있었는데….”
하이든이 제법 아련한 얼굴로 집을 바라보자, 하즈키는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그래도 그럭저럭 사셨네요?”
“…저게? 그럭저럭?”
하즈키의 터무니없는 발언에 하이든은 한층 어이없는 얼굴로 하즈키를 쳐다보며 물었다. 처음 봤을 때 두꺼운 돈뭉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두 개나 건넬 때부터 알아 봤어야 하는데, 하즈키는 하이든의 상상 이상으로 유복한 집인 듯했다. 하즈키는 하이든의 반응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눈알을 조금 굴리고는 조금 어색하게 변명했다.
“…다른 집들이랑 비교하면 평범하다는 거죠. 저기 옆집만 봐도 으리으리하네.”
하이든은 하즈키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고는, 금방 신경을 끄고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부잣집 초인종의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초인종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리자, 초인종 스피커에서 약간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요? 잡상인은 받지 않습니다.”
“의뢰하신 카네키 씨 댁 맞습니까? 하야카와 탐정 사무소의 히이라기입니다.”
“탐정? …아, 맞다. 그게 오늘이었나… 잠시만….”
인터폰에서 연결이 끊기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기다리자,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대문이 열렸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 현관까지 이어진 작은 정원의 길을 따라 걷던 두 사람이 현관문 앞에 멈추고 잠시 기다리자, 그제야 현관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하즈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급하게 나온 것인지 숨을 몰아쉬는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셔츠 위에 니트 조끼를 입은 중년의 남자는 하이든을 잠시 쳐다보더니 약간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음, 당신이 아내가 부른 탐정입니까? 명성에 비해 많이 젊어 보이셔서.”
“네, 히이라기 하이든이라고 합니다.”
하이든은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중년의 남자는 잠시 그 손을 빤히 바라보더니, 약간 불편한 기색을 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굳이 악수할 필요까지 있습니까?”
“아, 그럼 그냥 격없이 갈까?”
아무리 교육을 받았어도 본래의 성질머리를 억누를 수는 없는 하이든은 곧장 반말로 대꾸했고, 하즈키는 경악스러운 얼굴을 한 채 하이든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런 하이든의 태도가 불쾌한 듯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했는지, 금방 헛기침을 하고는 좋은 낯으로 말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아무튼… 우리 아내가 도난 때문에 의뢰를 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네. 아내 분의 성함이 카네키 츠보미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우리 아내가 워낙 조심성이 많은 터라, 이런 사소한 일에도 무척이나 주의를 기울이는 편입니다. 아내가 이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는 게 맞겠죠.”
“예, 뭐. 사소한 일인지는 지금부터 조사를 해봐야죠.”
“…상황은 집주인인 제가 더 잘 알텐데요?”
“글쎄?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지.”
“뭐 이딴… 성격이 더럽다더니.”
남자는 거칠게 한숨을 몇 번 내쉬고, 금방 돌아온 온화한 얼굴색을 하고는 하이든에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서… 아내가 의뢰한 건 도난 사건뿐입니까?”
“의뢰 내용은 기밀입니다.”
“나는 그래도 남편인데.”
“아내 분께 직접 물어보시죠. 도난 건이라고 하셨다면 그걸 믿으셔야지. 아내의 말을 안 믿으면 대체 누굴 믿습니까? 아, 혹시… 찔리는 일이라도 있으신가?”
난데없이 가하는 도발에 하즈키는 다시금 입을 벌리고 경악스러운 얼굴로 하이든을 쳐다보았다. 하이든은 너무도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무표정으로 중년 남자를 바라보는 채였다. 남자가 생각하기에, 지금은 자신이 잘못한 구석이 없음에도 하이든의 도발이 계속되자 남자는 척 보기에도 불쾌한 얼굴을 하고는 하즈키를 쳐다보았다.
“…옆의 학생은 누구입니까?”
“제 조수입니다.”
“하, 딱 보니 고등학생이나 되어 보이는데. 이런 어린 애를 데리고 다니는 걸 보면 탐정의 수준을 알 법도 하네요.”
남자의 말에 하즈키는 눈썹을 꿈틀했다. 남자에게 시비를 건 것은 하이든인데, 그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 그냥 분위기 메이커나 하겠….”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하던 남자는 하즈키를 슬쩍 쳐다보고는 움찔했다. 무척이나 짜증이 나 보이는 표정은 둘째 치고, 금방이라도 무언가 엎어버릴 듯한 기세로 하즈키가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기가 죽은 남자는 헛기침을 하고는 몸을 집 안으로 돌렸다.
“일단 들어오시죠. 아내가 곧 돌아올 테니.”
#5
“여기서 기다리세요.”
거실 소파에 두 사람이 앉자, 중년 남자는 이 말을 남기고 거실에서 나갔다.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지다가, 곧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소리가 나자 하즈키는 소파에 몸을 맡기고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상당히 불쾌하네요. 먼저 시비를 건 건 히이라기 씨인데 왜 저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지.”
“저런 거가 하는 말에 일일이 열 받지 마. 그리고 내가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사람 취급도 안 하시네요. 제가 보기엔 히이라기 씨가 시비 건 게 맞아요. 처음에 악수 가지고 좀 쩨쩨하게 굴긴 했어도 예의 있어 보이던데요?”
“난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이야. 뒤늦게 현관문 연 거 보지 않았어?”
“그건 그냥 현관에 늦게 도착해서 연 거 아니예요? 보니까 서두른 것 같던데.”
“뭐? 그냥 늦게 열어?”
하이든은 하즈키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상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예의 있게 악수를 청하는 것은 체스의 기본이다. 하이든은 체스를 오래 둔 만큼 그러한 태도가 일상에서도 습관이 되어 있었지만, 하이든의 기준에서 상대가 조금이라도 예의 없게 나온다 싶으면 그대로 돌려주는 편이다. 하이든이 본 남자는 하이든이 이렇게 행동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문을 열었을 때 이미 우리가 서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 대신 그대로 세워놓고 질문했잖아.”
“아.”
하즈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얼굴을 하자, 하이든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팔다리를 꼬고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예의 바른 인간이야. 우리에게 존댓말을 하고, 또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처럼 말했으니까. 하지만 존댓말을 쓴다고 예의가 바른 것은 아니고, 상대의 의견을 수용한다고 해서 서로 동등하다 여기는 것은 아니지.”
“…하게 해준다, 라는 말 때문인가요?”
“생각보다 이해가 빠르네. 자기 아내조차 자기와 동등하게 보지 않는 사람이, 아내의 의뢰를 받은 우리를 좋게 볼 리 없겠지. 그러니까 아랫사람 대하듯이 우리를 현관 앞에 세워 둔 채로 이야기를 진행한 걸 거고.”
“아… 그럼 악수하기를 꺼려한 것도 히이라기 씨를 아랫사람으로 봤기 때문에 그런 거겠군요.”
“그렇지. 뭐, 그만큼 읽기 쉬운 얄팍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히이라기 씨가 시비를 건 것은 맞다고 생각해요.”
“마음대로 생각해라.”
제법 평온한 목소리의 대화가 끝나고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자, 갑작스럽게 소파에서 등을 뗀 하즈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아, 생각하니까 열 받네? 히이라기 씨, 우리 이 의뢰 때려 치죠? 저런 거 돕기 싫은데?”
“의뢰를 한 건 저런 거가 아니라 저거의 아내야. 그리고 저거 엿 먹이는 건 잔금 받고 나중에 해도 충분해.”
“음, 그 말도 맞네요.”
무척이나 평온하게 말하는 하이든에, 하즈키는 금방 밝게 반응하며 방금까지의 짜증 어린 얼굴을 지워버렸다. 금방 바른 자세로 소파에 앉은 하즈키에 하이든은 눈알을 옆으로 돌려 가만히 쳐다보았다. 저번이나 오늘 사무소에 들어올 때 모습과 불만을 표하는 모습이 상당히 다르기에, 하이든은 하즈키의 본질이 평소의 깨발랄한 느낌의 언행보다는 짜증이 많은 모습이 더 적절하다고 봤다.
“굳이 활달한 척을 하는 이유가 뭐지? 실제로는 꽤 짜증이 많아 보이는데.”
“그… 히이라기 씨 성격을 중화하려면 활달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
미묘한 얼굴로 말하는 하즈키에 하이든은 어떤 보이지 않는 비수가 등을 콱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일 뿐인데, 대체 악명이 어떻게 퍼져 나갔으면 어린애까지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찰나의 자괴감이 들었다. 하이든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하즈키를 바라보지 않으며 허탈하게 말했다.
“굳이 안 그래도 돼….”
“엥? 하지만 히이라기 씨 성질머리가 이미 그 모양인데?”
굉장히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하즈키에, 하이든은 떨떠름한 얼굴을 한 채로 하즈키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불평하듯이 말했다.
“…근데 그런 말을 하는 거 보면 너도 성질머리가 더럽다는 뜻 아닌가?”
“자존심이 강하다고 표현해 주실래요? 그보다 ‘너도’라는 거면 본인 성격 더러운 거 알고 계셨어요?”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나 볼 때마다 성격 더럽다 그랬거든.”
“아… 경찰이랑 일할 때요?”
“그렇지.”
하즈키의 말에 하이든은 즉각 대답했다. 그때 함께 했던 세 사람 중 둘은 하이든에게 성격이 더럽다는 말을 자주 하고는 했다. 렌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가끔씩 짓는 묘한 표정이 하이든의 성격을 증명해주고는 했다. 거기까지 떠올리고 피식 웃은 하이든은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걸 너한테 말 했던가?”
“그것 때문에 히이라기 씨가 유명해진 거잖아요. 최근 기사에도 적혀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아.”
하즈키는 하이든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반응하며 쳐다보았다. 하이든은 신문에 자주 났었다. 경찰과 협력하던 시절, 자신을 알아봐 준 렌과 함께 사건 현장을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답을 찾았다. 그 중에서도 하이든의 이름을, 악명을 가장 많이 알린 사건은 바로 그 사건일 터였다. 하이든은 조금은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지. 신문에도 많이 났었지. 그렇지….”
“미안해요, 내가 좀 늦었죠?”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하이든은 정신을 차렸다.
#6
“미팅이 예정보다 늦게 끝났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히이라기 탐정. 옆의 학생은 누구인가요?”
현관과 이어진 통로에서 밝은 색의 정장을 입은 중년 여성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얼핏 봐도 미인인 얼굴이었지만, 이미 그만한 얼굴을 갖춘 하이든은 크게 감흥이 오지 않았다. 하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저번에 뵈었지만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하야카와 탐정 사무소의 히이라기 하이든입니다. 여기는 조수, 하즈키 레이야입니다.”
“안녕하세요.”
중년 여성은 하이든의 손을 잡고 가볍게 악수를 하며 하즈키를 살짝 돌아보았다. 하즈키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여성은 손을 놓고 이번에는 하즈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어머, 귀여운 아가씨네. 반가워요. 나는 카네키 츠보미라고 해요.”
“네, 카네키 씨.”
츠보미가 가까이 다가오자, 하즈키의 코에 부드러운 머스크향부터 어딘가 톡 쏘는 민트향까지 온갖 향이 스쳤다. 느껴지는 좋은 향에 하즈키는 긴장된 미소를 짓고는 조심스럽게 츠보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두 사람의 인사가 대충 마무리된 것을 본 하이든은 무감각한 얼굴로 츠보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의뢰 내용은 저번에 말씀하신 것 외에 더 없을까요?”
“네, 더 없어요. 의뢰 내용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일단 현장으로 안내해 주시죠. 그리고, 실례가 안 된다면 의뢰 내용을 다시 말씀해 주셨으면 하는데.”
“아, 네. 따라오세요.”
츠보미는 하이든의 물음과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중년 남자가 올라간 것으로 추정되는 계단을 밟으며 츠보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도둑이 든 것 같아서요. 경찰에 신고를 하기에는 좀… 느낌이 묘해서 아직 신고를 안 했습니다.”
“느낌이 묘하다니요?”
하즈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앞서가던 츠보미는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 장신구 한 두 개가 사라져서요. 머리핀이나 반지, 목걸이 같은….”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들이네요.”
“맞아요. 게다가 제가 가진 장신구 중 가격대가 낮고 구하기도 쉬운 것들이에요.”
거기까지 대답한 츠보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움직이는 상태로 설명을 계속했다. 아까 본 의뢰서로는 설명이 부족했던 하즈키는 지금 츠보미의 설명에 최대한 귀를 기울였다.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들이라 제가 길을 가다 잃어버렸을 수도 있지만, 3달 전부터 갑자기 물건이 사라지기 시작했거든요. 집 안의 방들은 딱히 잠가두지 않으니, 어쩌면 도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게 정말 도난인지 확신을 가지고 싶어서 의뢰를 했습니다. 제 착각인데 경찰분들이 고생하면 좀 그렇잖아요.”
“경찰에 신고했는데 단순 분실이면 오히려 다행이죠! 어쩌면 누군가 경찰서에 분실물을 맡겨뒀을 수도 있고요.”
하즈키가 제법 밝은 목소리로 말하자, 츠보미는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마찬가지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까요? 그래도 일단 부탁드려요.”
“여보, 왔어?”
2층 복도를 지나던 중, 갑자기 문 하나가 열리더니 아까의 중년 남자가 튀어나왔다. 웃는 낯으로 나오는 남자에 하즈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여보, 여기 있었어?”
“일은 잘 하고 왔고? 힘들진 않았어?”
그러고는 별안간 닭살 돋는 부부의 대화가 이어졌다. 누가 봐도 남편이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게 보이는 닭살 부부 같은 모습에 하이든과 하즈키는 속이 조금 더부룩해졌다. 한참 대화를 나누다 뒤에 남겨진 두 사람이 그제야 떠올랐는지, 츠보미는 당황해하며 두 사람에게 사과했다.
“어머, 미안해요. 여보, 이따가 봐.”
“응, 이따 봐.”
닭살스러운 볼 뽀뽀까지 끝내고 나서야 다시 이동하기 시작한 츠보미는, 어느 방 문 앞에 우뚝 멈춰섰다.
“여기예요. 물건이 사라진 곳. 제 드레스룸.”
#7
꽤 넓은 드레스룸 내부에, 하이든은 조금 피곤해진 얼굴로 츠보미를 돌아보며 말했다.
“끝나면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나가서 쉬고 계세요.”
“네, 부탁드려요.”
츠보미는 짧게 대답하고는 드레스룸을 나갔다. 드레스룸에 하이든과 하즈키, 단 둘만 남자 하이든은 조금은 움츠렸던 등을 쭉 펴며 말했다.
“그럼 일단 좀 살펴볼까?”
“잠시만요.”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움직이려던 하이든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조금은 묘한 얼굴의 하즈키였다. 하이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하즈키를 쳐다보자, 하즈키는 조금 부들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 카네키 츠보미 씨가 그 카네키 씨예요? 유명 회화가인 카네키 타츠야의 예술성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그걸 이제야 알았나?”
하이든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하즈키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아무 말도 못하더니 겨우 입을 열고 외쳤다.
“…그걸 어떻게 쉽게 알아요!! 아까 카네키 츠보미라고 할 때부터 혹시나 했는데!! 향이랑 예술을 조합한 요즘 핫한 예술가잖아요!!”
“왜 혹시나 했는데?”
하즈키는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읊조렸다.
“…손톱 사이가 알록달록 하더라고요. 처음엔 푸른색이 보여서 손톱에 멍이 들었나 했는데, 다른 색들도 보여서.”
“…생각보다 눈썰미가 좋네?”
“뭐, 그렇죠. 전 쓸모가 좋다고요.”
조금 놀란 눈치인 하이든의 말에 하즈키는 제법 만족한 것인지, 조금은 풀어진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대략적인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하이든은 그제야 드레스룸을 제대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거… 내 집 절반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네? 그 정도 크기 집이 존재해요?”
“하즈키…. 세상은… 이 드레스룸 절반만 한 곳에서도 못 사는 사람이 많단다.”
“예? 거짓말이죠?”
하이든은 순진한 하즈키의 경악에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이든도 이런 크기의 집에서 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몇 년 전까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2년 간의 경험은 하이든의 생각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하즈키, 이 방의 구조를 보고 드는 생각이 있나?”
금방 주제를 바꿔 하즈키에게 질문하는 하이든에, 하즈키는 잠시 드레스룸을 조용히 둘러보고 말했다.
“화장대가 있네요? 그래서 장신구가 여기에 있나?”
“그렇지. 보통은 침실에 함께 있는데 말이야.”
그렇게 대답하고 하이든은 드레스룸의 구조를 자세히 살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오른쪽에 화장대와 액세서리함이 존재했다. 남은 세 개의 벽을 가득 채우는 것이 바로 츠보미의 옷이다. 2단으로 된 행거는 보관천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투명한 비닐로 안쪽의 옷을 볼 수 있었기에 행거 가득히 걸린 옷의 종류를 엿볼 수 있었다. 행거 아래쪽에 자리한 2단짜리 신발 받침대는 바닥과 조금 띄어져 있어 사실상 바닥까지 활용할 수 있는 3단짜리 받침대였고, 코트처럼 긴 옷들이 자리한 받침대 제일 위쪽은 신발 앞코만 겨우 보일 정도였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지.”
하이든은 느릿하게 방의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알 수 없는 하이든의 행동에 하즈키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하이든은 가만히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그럼… 추리를 시작해볼까?”
#8
하이든이 길게 눈을 감았다가 뜨자, 거대한 흑백의 격자발판이 발 아래에 펼쳐졌다. 건너편에 자리한 백색의 체스말들은 금방이라도 하이든을 밟고 싶은 듯이 그 자리에서 위압감을 보였다. 하이든이 잡아야 하는 것은 백색의 왕, 사건의 진실이자 범인이다. 백은 하이든에게 폰을 하나 내밀었다.
“…그렇긴 하지.”
경비 시스템이 설치된 카네키 저택, 만약에 누군가 침입했다면 경보가 울리지 않을 리가 없다. 백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사건이 아니라 츠보미의 분실 사고라고.
“하지만 경비에 걸리지 않고 이 저택을 오갈 수 있는 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지. 남편, 가정부, 제3의 인물.”
백이 내미는 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이든의 말에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것. 그 말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이든이 내미는 것은 마찬가지로 폰이다. 하즈키 레이야라는 이름의 폰.
“그런데 왜 남편은 조금 숨을 몰아쉬었을까요?”
하이든이 움직이기도 전에 하즈키는 두 칸 앞으로 나아갔다. 하이든은 제법 흥미로운 눈으로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굳이 자기가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무엇이 중요한지 짚어내는 능력은 충분한 듯했다. 백은 다른 기물을 앞으로 보내며, 손님을 조금이라도 덜 기다리게 하려면 서두르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하이든은 아직 나약한 폰을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하이든의 포지션은 잡히면 끝인 킹이 아니라 앞으로 나서는 퀸이었으니 말이다.
“이상한 부분이지. 우리를 밖에 세워둔 채 대화를 할 정도로 무례한 이가 우리를 기다리게 하지 않으려 서둘렀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백의 폰을 하나 붙잡은 하이든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백은 당신들이 들어왔을 때 이 집에는 남편밖에 없었노라고 주장했다.
“그것의 연장선이야. 왜 당신은 조금 지쳐서, 늦게 나왔을까? 인터폰은 1층에 있었는데 말이야.”
하이든의 수에 백은 손님을 맞이하는 데 잠옷을 입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라고 반박했다. 하이든은 코웃음치며 수를 확정지었다.
“아랫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뭐가 있지? 아내 때문이라고 해도 똑같아. 우습게 보는 사람이 뭐라고 하든 당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백은 자신은 아예 예의를 모른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비숍을 내놓았다. 상대의 전략이 무너지는 것을 짐작한 하이든이 차분하게 다음 수를 고를 때였다.
“그러고보니 남편은 왜 하필 2층으로 올라갔을까요? 1층에도 방은 있었고, 2층은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이니 더 신경 쓰였을 텐데요.”
“뭐, 그건 2층에 주로 지내는 방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에이.”
자신의 의견에 하이든이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하즈키는 아쉽다는 듯한 소리를 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이든은 그런 하즈키를 잠시 바라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복도에 나와서 큰 소리로 시간을 끈 것은 이상한 일이지. 마치 누군가가 들으라고 하는 것처럼.”
방금 하즈키는 살짝 엇나가긴 했지만 좋은 부분을 짚었다. 생각보다 쓸모 있는 기물이 들어왔다는 기쁨을 누리며 하이든은 앞으로 크게 움직였다. 백의 말은 무척이나 동요했고, 그로 인해 쓸모없는 수를 두었다. 앞으로 단 한 수, 하이든이 어떤 수를 제시하느냐에 따라 이 승부는 끝날 수도 있었다.
“히이라기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조금 당당한 웃음을 지은 하즈키가 어떤 곳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 냄새가 나는데.”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먼저 지치는 것은 단연 후각이다. 하루 종일 계속 향을 맡는 코라면 당연히 냄새에 둔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하루종일 향기 속에 빠져 사는 츠보미 같은 사람이라면 집에서 어떤 향수 냄새가 나든 제대로 인지할 수 없을 터였다. 하즈키가 가리킨 곳의 신발 진열대를 살펴보면, 조금은 이질적이게 낡은 구두가 하나 보였다. 하이든은 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래,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지만… 나는 군자가 아니라서.”
하이든은 제법 사악하게 웃으며 눈을 떴다. 본인은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이라 하지만, 하즈키가 보기에 하이든은 상당히 속이 좁을 뿐이었다.
“체크메이트.”
#9
탐정이 오는 것을 깜빡했던 덕에, 평소에 몸을 숨기던 드레스룸에 자리한 내연녀는 금방 발각되었다. 사라진 귀금속은 내연녀가 단순히 훔친 것도 아니고, 남편이 이 중에서 가져도 될만한 것들을 짚어주는 식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즉, 남의 물건으로 선물을 하는 생색을 남편이 아내의 물건으로 냈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카네키 저택은 난리가 났지만, 저쪽의 집안이 파탄 난 것은 하이든 때문이 아니라 외도를 한 남편의 잘못이었으므로 하이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하즈키도 마찬가지인지 하즈키는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을 했다. 물론 약간의 통쾌함도 얼굴에 담긴 채였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하이든은 하즈키를 바라보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걸었다.
“…하즈키.”
“네.”
“너 제법 쓸만하다?”
“그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탐정 다 뒤졌네요.”
“입이 험하다.”
“자신을 돌아보실래요?”
하이든은 하즈키의 말에 자신을 돌아보았지만, 딱히 입이 험하다고 할 법한 구간은 찾지 못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이때 쓰일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런 편이었다. 한참 조용하던 두 사람 사이에 갑작스럽게 하즈키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하이든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고보니, 히이라기 씨는 받은 대로 돌려준다고 했잖아요. 그럼 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말을 놓은 게 그만큼 제가 예의 없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어.”
즉시 답을 내놓는 하이든에 하즈키는 경악스러운 얼굴을 하며 항변했다.
“맙소사. 아니, 시험 좀 해볼 수도 있죠?”
“그게 문제야. 내 실력을 의심해? 사장도 내 능력은 의심 안 했는데.”
“어라, 히이라기 씨가 사장이 아니예요?”
하이든의 말에 하즈키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한 채 하이든에게 물었고, 하이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는 대답했다.
“내가 사장이었으면 하야카와 사무소가 아니라 히이라기 사무소였겠지. 너 이상한 곳에서 띨빡하네.”
“음, 제가 좀 그렇죠.”
하이든의 말에 하즈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어쩔 때는 자존심이 강해 보이면서도 이러는 거 보면 또 다른 모습이라 생각하며 하이든이 하즈키에 대한 정보를 머리속에 정리하려던 순간, 하즈키는 하이든에게 어떤 질문을 했다.
“그럼 사장님 이름은 뭐예요? 성은 하야카와인 것 같은데.”
하즈키의 질문에 하이든은 순간 숨이 막혔다. 하야카와 사무소의 사장. 하이든의 가치를 알아보고 먼저 손을 내밀어준, 하이든에게 있어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 그 사람의 부재를 떠올리려 하는 순간마다 하이든의 심장은 무척이나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특히, 그 사람과 무척이나 닮은 이 어린 소년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하이든은 가빠오는 숨을 잠시 고르고, 차분한 목소리로 눈앞의 소년을 그에 겹쳐보며 불렀다.
“렌.”
#00
하즈키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하즈키는 오늘 하이든과 함께 하면서 제법 성과를 올렸으니, 이제 하이든이 자신을 온전히 조수로 받아들일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즈키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벽에 붙은 사진판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사진판 위에는 자신이 찍힌 사진들이 많았다. 보기에는 자기애가 강한 평범한 사춘기 소녀의 사진판이지만, 그는 사진을 구경하는 대신 망설임 없이 그 사진판을 뒤집었다.
“말하던 것보다는 성격이 더 안 좋던데. 대체 어떻게 버틴 거지?”
뒤집은 사진판 뒤는 덕지덕지 붙은 사진과 기사, 그것들을 연결된 붉은 실로 엉망이었다. 당시 제법 크게 보도되었던 사건들, 미제 사건 해결이나 연쇄 살인 사건 해결 같은 기사가 많았지만 판의 정가운데를 차지한 것은 어떤 탐정의 실종 기사였다. 1년 전에는 무척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유력 용의자는 동기도 증거도 없어 흐지부지된 사건. 이 사건과 연관된 3명의 사진이 이 기사 주변에 삼각형을 그린 채 붙어 있었다. 한 명은 경찰, 한 명은 선생님. 남은 한 명은 전 체스기사이자 현 탐정인 히이라기 하이든이다.
“…사장이라.”
그의 시선이 실종 기사 바로 옆에 붙은 인물 사진으로 향했다. 사진 속 인물의 머리색은 외국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무척이나 드문 붉은색이다. 그의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은 낯선 호칭이네.”
실종된 지 1년이 넘어가는, 왼쪽 눈에 흉터가 남은, 자신과 무척이나 닮은 남자. 이 남자를 아는 이라면, 분명 자신을 봤을 때 남자를 떠올릴 만큼 닮아 있다. 그는 그 사진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뭐라고 불리는 걸 가장 좋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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