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믿어야 하는 변호사와 의심하는 검사
기소. 상대를
잿빛 머리의 검사는 자신의 방을 좋아했다. 보통 사람이 떠올리는 검사의 방이라고 하기엔 좁지만 실제로는 보통의 평검사가 지내는 방, 딱 그 정도의 크기다. 검사의 방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처럼 창가에 값비싼 동양난이 자리하고, 책장에는 사건 자료와 법전이 가득히 꽂힌 방이지만 이 방의 주인은 평범한 검사는 아니었다. 몇 년 전, 20대의 나이로 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 두 건을 해결하며 스타 검사라는 칭호를 얻은, 엘리트라는 말 외에는 표현하기 힘든 그런 검사가 이 방의 주인이다. 그런 실적을 올린 사람이 아직도 평검사에 머무르는 이유는 단순하게도, 이제는 스타 검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2년 전, 유명 국회의원 히포크리테가 위법한 절차로 시행된 건설 사업의 소송을 막기 위해 공사 현장에 자신이 살해한 아들의 시신을 유기하고, 현장 인부에게 살해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 한 통칭 히포크리테 살인사건. 그 사건의 담당 검사였던 이가 바로 이 방의 주인이다. 항소심 도중 검사는 의원에게 협박을 받아 억울한 이에게 누명을 씌워 허위 자백을 받아낸 것을 고발했다. 여기까지는 대중들도 검사에 대해 동정의 여론이 있었지만, 이후 검사가 자신이 해결한 두 건의 미제 사건이 사실 허위 자백으로 해결한 사건이라 고백하면서 여론은 완전히 기울었다. 지금이라도 바로잡겠다며 재수사를 지시했지만 자신의 의지로 무고한 이를 속이고, 모욕하면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는 과거는 사람들의 시선을 삐뚜름하게 비틀 수밖에 없었다. 검사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은 죄로 좌천되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승진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과거 이 검사가 중얼거린 것처럼 평생 한직을 전전하며 이 작은 방에서 남은 검사 인생을 보내야 할 터였다. 검찰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사람, 평생을 엘리트로 살던 삶. 그는 그가 영광으로 여기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에도 편안한 얼굴을 지을 수 있었다.
“…자, 한번 볼까?”
검사는 느릿하게 모니터와 서류를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경찰이 체포한 용의자이자 검사가 기소한 피고인, 멤논 아가일 코브. 35세 남성으로, 직업은 사채업자, 법정 이자율보다 훨씬 높은 이자율에 현재 경찰이 이번 사건과는 별개로 해당 사채 기관을 수사 중이다. 미성년자 시절 소년원에 다녀온 적도 있는데다 폭력 전과도 있고, 심지어 2년 간 교도소에 다녀온 적도 있다.
“…단순 폭행은 어지간하면 벌금이나 합의로 끝나는데.”
검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폭행으로 교도소까지 다녀왔다면 어지간히 때린 것은 아니란 의미였다. 검사는 사건 자료를 조금 더 읽어 나갔다. 사건은 지난 12월 9일에 발생했다. 사람이 떨어졌다는 신고를 접수한 119는 곧장 출동했고, 떨어진 사람의 상태에서 사건성을 느끼고는 경찰에 연락했다. 이미 몸이 멍으로 가득해 사인을 구별하기 힘든 지경인 것을 보면 분명 단순 추락사는 아니었다. 천만 다행으로 신고자가 시신의 신원을 금방 확인해주었는데, 떨어진 사람은 이피네 이아 어벤지, 31세. 신고자와 같은 빌라, 같은 층에 사는 여성으로 오가다 종종 얼굴을 마주친 사람이라 신고자는 진술했다. 경찰은 곧장 신고자의 설명에 따라 피해자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고, 살짝 열린 피해자의 집 문을 볼 수 있었다.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 한가운데에서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술냄새가 나는 피해자의 남자친구, 피고인을 발견했다. 거실에 흩뿌려진 핏자국과 함께 말이다.
“…부검소견서를 어디 뒀지?”
검사는 피해자의 부검소견서를 살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추락으로 인한 두개골 파열이다. 높이도 피해자의 집이 있는 층에서 떨어졌을 거라 추측한다. 하지만 이미 폭행을 심하게 당한 상태로, 추락하지 않았어도 1~2시간만 방치됐다면 죽었을 거라 부검소견서는 결론 내렸다. 그러나 부검서에서 추락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결론짓지 않았다. 현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부검의의 특성 상 피해자가 폭행을 심하게 당하긴 했지만 당시 움직임이 불가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혹시나 다른 용의자의 가능성은….”
경찰의 조사 결과 최초신고자는 신고 이전까지의 알리바이가 명확했다. 막 회사에서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데다, 어떠한 격투기도 익히지 않은 여성이 피해자의 몸에 남은 흔적만큼의 상해를 입힐 수 없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빌라이기 때문에 건물과 인근에 CCTV는 없었지만 피해자의 거주지 문이 열려 있던 점으로 인해 외부인의 침입을 염두했으나, 피고인의 주먹에 남은 타격흔, 그리고 피고인의 얼굴에 난 손톱 자국과 피해자의 손톱 밑에서 발견된 살점의 유전자가 일치하면서 피고인을 명백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경찰이 이 증거들을 들이밀며 몇 번을 물어봐도 피고인은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여기까지 훑어본 검사는 잠시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다가, 눈을 뜨며 움직임을 멈췄다.
“역시 쟁점은 이거네. 폭행 치사냐, 살인이냐.”
검사는 피고인을 살인으로 기소했다. 폭행 치사면 검찰의 구형은 3년부터고, 실제 형량도 그와 비슷하게 나오지만 살인이면 아무리 우발이라 해도 10년에서 시작할 수 있다. 거기에 피고인의 전과까지 생각한다면 길게는 20년까지 기대할 수 있겠지만, 물론 이건 전부 이론상의 이야기다.
“문… 제는 피고인이 술에 취한데다, 피해자의 남자친구란 점인가? 힘들 수 있겠는데….”
원래 형법상 타의에 의한 심신미약만이 감형 요소에 들어가지만, 술에 유한 이 나라의 특성상 술에 취했다고 하면 감경을 해줄 것이다. 더욱이 피고인이 피해자의 남자친구이기에, 이전의 판례들을 살펴보면 최악의 경우 살인을 인정하면서도 가벼운 구형과 함께 집행유예가 나올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검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보았다. 검사가 창밖의 잿빛 건물들을 내려다보던 것도 이젠 과거의 이야기다. 검사는 이제 자신의 머리색과 닮은 잿빛 세상이 아닌,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무척이나 존경하고, 또 좋아하는 변호사의 눈과 조금은 닮은 파란 하늘을 말이다.
“…그래도 해야지. 검사니까.”
검사는 검은 눈에 푸른 하늘을 가득 담으며 의지를 다졌다. 자신밖에 모르던 흔한 검사가 이토록 바뀌게 된 것은 모두 한 변호사 때문이었다. 발로 뛰며, 피고인조차 포기한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던 사람.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결국 진실을 밝혀낸 사람. 변호사를 떠올리며 검사는 조금은 작게 웃었다.
“이 정도면 제대로 된 검사일까요? 렌 씨.”
조용히 중얼거린 검사는 다시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전과 같은 짓은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이 허튼 마음을 먹지 않도록 확실한 증거만을 탐색했다. 현장을 몇 번이나 다녀왔고, 피고인의 주변인도 직접 만나봤다. 결과는 너무도 명확한 흑이다. 그에게 시달리던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에, 가족은 피고인의 변호사 선임을 포기할 정도의 포악함이다.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주제에 세상에 존재하는 악이란 악은 모두 모아두었다 싶어 검사는 혀를 찼다. 그 무렵, 피고인의 변호인이 등록됐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로펌이려나, 국선이 좋은데.”
검사는 기지개를 키며 중얼거렸다. 피고인에게 변호사가 붙는 것은 피고인의 당연한 권리이기에,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권리를 실행한다. 변호사를 붙이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돈을 주고 변호사를 고용하는 방법이다. 특히, 멤논처럼 돈이 많은 사람은 로펌에서 변호사를 고용하곤 했다. 로펌, 이들은 돈만 주면 연쇄 살인범도 무죄로 만들어줄 양아치들이므로 검사가 만나기에 최악의 상대다. 반대로, 여러 사정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변호사를 고용할 수 없는 피고인은 국가가 국선 변호사라는 유급 봉사자를 붙여준다. 물론 국선 변호사는 무척이나 맡는 사건이 많아 승소하는 경우는 적기에 이편이 검사에게는 호재다. 검사는 조금 우려스러운 마음을 안고 피고인의 변호사를 조회했다.
“…어?”
충격에 눈을 동그랗게 뜬 검사의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 앉았다. 검사의 눈에는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의 사진이 비쳤다. 순식간에 등에 식은 땀이 흐른 검사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변호인 정보를 쭉 훑어본 검사는 이 극악무도한 피고인의 변호를 맡은 이가 검사를 이끌어준 그 변호사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올곧고, 진실을 파헤치는 사람. 불나방보다 빛나고 하늘보다 고결한 변호사. 검사는 충격 어린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변호사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하야, 카와. …렌.”
33살의 검사, 하이든 R. 위버.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 * *
붉은 머리의 변호사는 자신의 사무소에 어떠한 의견도 없었다. 그저 자기 형편에 맞는 위치였고, 개업 선물로 받은 관엽 식물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실내에서도 잘 자란데다, 이런 환경은 변호사가 일하는 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떤 환경이든 잘 사는 것은 변호사가 처한 곤경에도 마찬가지였다. 재정난에 시달리고, 소송에서 패소해도 자신이 배운 것을 돌려주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에 변호사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였다. 이 사람의 굴곡이 조금 더 적어진 것은 2년 전 히포크리테 살인 사건을 해결한 이후. 시달리던 재정난도, 패소의 아픔도 적어진 지금 그에게 불안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
변호사는 말없이 법률 사무소의 창 밖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법률 사무소의 창 밖은 원래 색을 알아보기 힘든 건물뿐이다. 건물도 빽빽하고, 층도 낮아 하늘을 보는 것은 밖에 나가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타개할 곳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 변호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응당 변호사라면 어떤 사람이든 변호해야 한다. 변호하는 이가 얼마나 악인이라도, 설령 혐의가 명확해도 지은 죄에 비해 과한 형량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게 변호사가 하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피고인은 미성년 시절부터 해서 전과만 10개가 넘어가는 폭행범으로, 피고인이 폭행한 게 확실하고 피해자가 사망한 이상 아무리 폭행 치사로 만든다고 해도 구형을 면하기 힘들다.
“…이 사람을 무죄로.”
그렇다. 변호사는 이 사람을 무죄로 만들어야만 했다. 어떤 이유가 있는 지는 불문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변호사는 검찰 조서에 적힌 담당 검사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불쾌함, 다음은 안쓰러움, 이제는 믿음직한 검사. 그런 이와 당당히 마주할 수 없음에 괴로워하며, 변호사는 덜덜 떨리는 양손을 모아 쥐었다.
“…이든 씨, 제발. 제발… 져주세요. 제발….”
38살의 변호사, 하야카와 렌. 그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1차 공판. 의심하다
렌이 마주한 것은 거구의 사내다. 190이 넘어가는 하이든이나 모치즈키보다 조금 작은 키, 하지만 몸무게는 3배는 되어 보이는 몸. 팔다리에 보이는 갖은 문신에는 혐오 표현이 담긴 것도 많았다. 거들먹한 표정으로 렌을 내려다보듯 쳐다보는 남자의 이름은 멤논, 렌이 변호해야 하는 피고인이다. 렌은 조금은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멤논 아가일 코브 씨?”
렌의 말에 멤논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오만함이 번들거리는 눈을 한 멤논은 렌을 내려다보며 어딘가 섬뜩한 느낌이 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명한 변호사가 여긴 무슨 일로?”
“코브 씨의 변호를 맡게 된 하야카와라고 합니다.”
“아, 내 변호? 왜?”
멤논의 목소리에는 놀라움보다는 비꼬는 느낌이 훨씬 많이 풍겼다. 렌은 괜히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코브 씨의 무죄를 받아달라는 의뢰인이 있었습니다.”
“그 의뢰를 받은 거면 당신이 보기에도 이상했나 보지? 역시 사람 팬 걸로 이렇게 욕 먹는 건 말이 안 돼.”
웃는 낯으로 당당하게 말하는 멤논에 렌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렌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멤논에게 물었다.
“…그럼 사람을 때린 건 맞습니까?”
“말 좀 안 들으면 때릴 수 있지.”
멤논의 모든 것에서 죄책감이라고는 발견되지 않았다. 렌은 마주 잡은 자신의 양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왜 때렸습니까?”
“제대로 기억은 안 나는데, 뭔가 짜증나게 했던 거만 기억나네.”
“정말 던지지는 않았습니까?”
“그건 진짜 기억이 안 나.”
“경찰이나 검찰 조사에서는 어디까지 말했습니까?”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고 했지. 때렸다고 하면 또 지랄할 게 뻔하니까.”
“계속 그러셔야 합니다. 유감이라 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 반성문도 최대한 많이 쓰세요. 형량에 영향이 큽니다.”
“인권 변호사라더니, 회피에 도가 텄는데?”
멤논의 말에 렌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수많은 민사 소송을 진행하면서 자신은 절대 하지 말겠다 생각하던, 어떻게든 죄를 회피시키는 상대 변호사의 행동을 자신이 하니 속이 절로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아.”
한참 렌을 비웃듯이 말하던 멤논의 입에서 뭔가 작은 깨달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렌은 느릿하게 멤논을 쳐다보며 물었다.
“…뭐 떠오른 게 있습니까?”
“생각해보니까, 끙끙대는 게 시끄러워서 던져버린 것 같….”
렌은 양 손바닥으로 두 사람 사이의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용하던 렌의 입에서 괴로운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한 얼굴로 말할 수 있습니까?”
“왜? 사실대로 말해달라며. 경찰에만 말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멤논의 대답에 렌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애초에 상식이란 것이 없는 상대에게 상식을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렌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겠습니다.”
접견실에서 나오는 렌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접견실에서 조금 멀어지자 몸에 힘이라곤 없어 보이던 렌의 느릿한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거의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황급하게 달려간 렌은 화장실 문을 열어 젖히고 곧장 변기에 얼굴을 처박았다.
“우욱.”
렌의 입에서 구역질 소리와 노란 액체가 침과 뒤섞여 나왔다. 먹은 게 없어 텅 빈 위는 누가 쥐어 짜듯 조여왔고, 아래서부터 타들어가는 느낌으로 식도를 느낄 수 있었다. 렌의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찔끔 배어 나왔다.
“…하아.”
렌은 자기도 모르게 화장실 바닥에 주저 앉았다. 정당한 판결을 받게 도와야 하는 변호사가, 죄인이 벌을 면하도록 힘을 쓴다. 이 사실만으로도 렌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 멤논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서는 렌이 꺾어야 할 것이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렌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제가 옳다고 믿은 것들을 전부 버려서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게.
“…유우나.”
렌은 눈을 감고 조용히 동생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렌의 자켓 안주머니에는 구겨진 종이가 한 장 들어있었다. 거기 적힌 말은 간단했다.
[동생을 살리고 싶다면 반드시 멤논을 무죄로 만들어. 신고하거나 무죄에 실패한다면 동생의 목숨은 없다.]
* * *
법정 안에 들어온 하이든의 눈에 보인 것은 어떠한 의심도 필요 없는 변호사, 하야카와 렌이다. 생활이 나아졌어도 여전히 후줄근한 잿빛 정장, 보복으로 인해 생긴 한쪽 눈의 흉터, 불꽃보다 붉은 머리카락은 이제 렌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것이다. 렌을 살펴본 하이든은 시선을 약간 옆으로 옮기고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앉은 거만한 표정의 사내, 멤논 때문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어떠한 기망도, 조작도 없었다. 거기에 멤논은 사채업으로 돈을 축적해 돈이 없지도 않기에, 원했다면 로펌 변호사 3명 정도는 충분히 고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렌이 멤논의 변호를 무료로 맡겠다 선언한 것이다.
“…말이 안 되는데.”
하이든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렌의 의중을 알고 싶어도 하이든이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방청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자들보다도 하이든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방청석의 가장 뒤쪽 구석 자리에 앉은 피해자의 어머니였다. 피해자와 피고인이 동거하는 집에서 10분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살고 있어, 찾아가지 않은 당신 스스로를 원망하던 한탄이 하이든의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의외의 인물도 하이든의 눈에 들어왔다. 딱 한 번 만났던 피고인의 남동생이다. 전에 만났을 때 피고인의 부모와 다를 바 없이 피고인을 도울 생각이 없다고 하더니, 이렇게 법정에 찾아온 것이다. 어떤 이유로 남동생이 법정에 찾아온 것인지 하이든이 곰곰이 생각에 잠기려 할 즈음,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하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란히 들어오는 배석판사와 부장판사를 바라보았다. 이번 재판의 부장판사는 여러 의미로 줏대 있는 사람이었다. 판례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신이 생각하기에 어떻느냐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판사. 그렇기에 오히려 까다로운 상대였다.
“바로.”
모두가 자리에 앉자, 부장판사는 잠시 변호석과 검사석을 훑어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재판의 시작을 선언했다.
“사건번호 2014노717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검사측, 발언하세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 멤논 아가일 코브는 지난 12월 9일, 피해자 이피네 이아 어벤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피고인은 피해자를 폭행한 뒤, 피해자를 창문에서 밀어 살해하였습니다. 피고인이 이미 여러 건의 폭행 전과가 있음에도 반성 없이 다시 폭행을 한 점, 이번에는 저항 불능 상태의 피해자를 밀어 살해했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가 피고인의 여자친구임에도 그 살해 방법이 매우 잔인한 점을 들어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합니다.”
하이든은 자신의 주장을 흔들림 없이 말했다. 사실 지금까지 판례를 따져보면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이 확정될 확률은 아주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든이 무기징역을 구형한 것은, 피해자의 변호사가 렌이기 때문이었다. 대체 상대가 어떤 형량까지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죄를 인정할지 가늠할 수 없는 지금 하이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 형량을 부여해야 했다.
“변호사측, 변론하세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판사의 말에 렌이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나며 판사를 바라보았다. 렌의 목소리에는 전과 달리 아무것도 담기지 않아 하이든이 흠칫한 것도 잠시, 렌은 무척이나 충격적인 발언을 입에 담았다.
“피고인, 멤논 아가일 코브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무죄?!”
하이든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는 재빨리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판사가 잠시 하이든을 째려보았지만, 헛기침을 하고는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하이든은 놀란 얼굴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고 렌을 쳐다보았다. 멤논의 무죄를 받아내는 것은 히포크리테 살인사건의 승소를 받아내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기망과 조작이 없는 상황에서 이토록 확실한 증거들이 즐비한 피고인의 무죄는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검사측, 변론하세요.”
어느새 평온한 얼굴의 판사가 하이든을 빤히 바라보며 변론을 요청했다. 하이든은 자세를 곧게 하고는 곧장 렌의 주장이 말도 안 되는 것임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재판장님, 피고인의 무죄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피고인의 자백은 없으나, 현장 증거와 정황이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변호사측, 변론하세요.”
하이든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힘겹게 돌려 오늘 처음으로 렌의 눈을 쳐다보자, 차마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렌의 무엇보다 반짝이던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이든이 그토록 좋아하던 렌의 붉고 푸른 눈은 그의 변론만큼이나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채였다.
“재판장님, 검사는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로 유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라뇨?”
하이든이 렌의 주장에 의아한 듯이 대꾸하자, 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이든을 쳐다보고는 무표정으로 발언했다.
“…어떻게 아십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피해자를 폭행한 것이 피고인이라는 사실을 검사는 어떻게 아시냐는 겁니다.”
“사건 당일 피고인의 손에 타격흔이 남아 있으며, 피해자의 손톱 밑 DNA가 일치합니다. 피고인의 얼굴에 남은 손톱자국을 생각해보면, 이것으로 증명되지 않습니까?”
하이든은 손가락을 전부 핀 채로 멤논을 가리키며 말했다. 멤논의 한쪽 볼에는 꽤 커다란 거즈가 붙어 있었다.
“물론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폭행을 가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피고인이 피해자를 빈사 상태에 이를 때까지 폭행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렌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해할 수 없는 주장에 하이든의 생각이 잠시 정지되었다. 렌은 하이든에게 생각할 여유를 줄 새가 없다는 듯 계속 논리를 이어갔다.
“현장 출동한 경찰의 증언에 따르면 현관문은 약 1~2cm정도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CCTV가 없는 빌라 특성 상 외부인이 출입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건 집에 남은 지문뿐입니다. 피해자와 피고인이 함께 사는 집에서 발견된 지문만 10개가 넘어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이 피해자를 폭행해 빈사 상태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어떤 의도입니까?”
“이의 있습니다. 변호사의 주장은 모순되어 있습니다.”
“아뇨,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하이든이 렌의 주장을 걸고 넘어졌지만, 렌은 하이든에게 호락호락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이 바로 반박에 들어갔다.
“피고인이 피해자를 폭행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저항할 수 있었다면, 빈사상태에 이르게 한 것은 피고인의 행위라 명백하게 입증할 수 없습니다. 이의 연장선으로 피해자를 창문에서 떨어트렸다는 주장 또한 반박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배 부분에 눌린 채 쓸린 자국이 남아 있지만, 이는 자의 또는 실족에 의해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흔적입니다.”
“이의 있습니다. 실족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렌이 근거로 제시한 부검소견서 이야기에 하이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 부검소견서는 추락의 원인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현장이 더해진다면 정황은 달라진다.
“부검소견서는 피해자의 상태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기에 소견서 만으로는 적절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현장에 대한 자료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하이든의 말에 따라 법정 내 모니터에 사건 현장의 창문 사진과 함께 피해자의 키를 나타내듯 인체의 윤곽도가 나타났다.
“창문이 위치한 높이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피해자의 키인 157cm와 비교했을 때 창문의 가장 낮은 부분이 피해자의 명치 부근에 위치합니다. 사람이 창문에서 실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배꼽 부근에 창문의 낮은 부분이 위치해야 하지만, 피해자의 키와 비교하면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장에서 발견된 물건들을 쌓아도 당시 피해자의 신체 상태를 고려하면 자의로 떨어지기에는 높이나 힘이 부족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문가의 소견입니다. 제출한 증거물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인용합니다.”
부장판사는 잠시 자료를 살펴보고는 양 옆의 배석판사들과 눈짓을 주고받더니, 하이든의 이의 제기를 인용했다. 하이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변호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불안한 얼굴의 렌은 잠시 명상하듯 눈을 감더니, 금방 눈을 뜨고 평온한 얼굴로 돌아왔다.
“…네. 그러나 자료에서 보실 수 있듯, 바닥에 놓인 물건들을 쌓아 피해자의 자의로 떨어질 가능성이 온전히 배제되지는 않습니다. 이상으로 변론을 마칩니다.”
자리에 앉는 렌을 보며 하이든의 마음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렌의 주장은 억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피고인이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작되지 않은 정황과 물적 증거를 부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렌이 부정하는 것들은 그런 것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목도한 하이든을 내버려두고 판사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휴정하겠습니다.”
* * *
짐을 정리하던 렌의 머리 위로 누군가 그늘을 드리웠다. 느릿하게 고개를 든 렌은 자신에게 그늘을 드리운 자가 하이든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렌은 무표정으로 하이든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하이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렌을 내려다보았다. 실망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얼굴에 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하이든을 바라보기만 했다.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평소의 렌 씨와는 전혀 다릅니다. 폭행을 했지만 안 했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죄 추정의 원칙 모르십니까?”
“이건 경우가 다릅니다. 전과도 있고, 심지어 유사 전적도 있습니다. 이건 무죄 추정의 원칙을 위반한 게 아니라 타당한 추론입니다. 렌 씨, 이건….”
“하야카와 변호사라고 부르세요, 위버 검사.”
렌은 하이든의 말을 끊었다.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하이든이라 불러주던 것과 달리, 하이든이 이유를 말했음에도 렌은 그를 위버라고 불렀다. 하이든의 얼굴에 충격이 서리자 렌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전 변호사 윤리는 지켰습니다.”
“하지만 렌… 하야카와 변호사의 윤리는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이든은 렌을 평소처럼 부르려다 황급히 말을 고쳤다. 렌이 단순한 변호사가 아닌 인권 변호사인 것은 렌의 신념에 의한 의뢰 승낙 때문이기도 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위기에 내몰린 자들의 의뢰만 받는 것이 하야카와 렌이란 변호사였다. 하지만 지금의 렌은 하이든의 말에 그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윤리와 법은 다르죠. 저는 법을 지킬 뿐입니다.”
“죄를 지은 이가 무죄 판결이 나는 것은 적법한 일입니까?”
“…피고인은 무죄여야만 합니다.”
렌의 대답에 하이든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피고인이 범인이라 확정된 것은 아니다. 피고인 본인도 계속 혐의를 부정하고, 렌의 주장대로 정말 외부인이 들어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렌은 하이든의 말에 별 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입장을 고수할 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렌은 피고인이 유죄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 무죄여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말한 것 아닙니까? 그럼 저는 피고인이 유죄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게 검사의 역할이니까요.”
하이든은 한참이나 아무 말없이 렌을 바라보다 겨우 입을 열었지만, 렌은 아무 대꾸 없이 그저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럼 최선을 다 해보세요.”
한참이나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느릿하게 고개를 들며 하이든을 바라보았다. 하이든을 바라보는 렌의 눈은 이젠 약간의 슬픔이 감도는 채였다.
“저번에는 당신이 틀렸다는 걸 제가 증명했었죠. 이번에는 당신 차례입니다.”
렌의 말에 하이든은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자신이 믿는 게 진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렌의 업적이었다. 이젠 하이든이 렌이 잘못되었다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하이든은 잠시 머뭇거렸다. 과연 자신이 렌처럼 단단한 사람의 논리를 해체할 수 있는지, 역으로 설득되는 것은 아닌지 여러 고민이 스쳐갔다.
“그럼요.”
그럼에도 하이든은 해야만 했다. 자신에게 잿빛 세상을 알려준 렌을 위해서, 이번에는 하이든이 나서야할 차례였다. 10명의 범죄자를 놓치지 않는 것이 하이든 같은 검사가 해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2차 공판. 확신하다
1차 공판으로부터 이틀 뒤, 하이든에게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 생겼다. 하이든의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은 아사이 나나미, 렌보다 더한 수식어를 소유한 인권변호사다. 고졸 사법고시 합격도 모자라 22살의 나이로 최연소 사법고시 합격, 사법연수원 수석 졸업, 재심 전문 변호사라는 독보적인 위치까지. 유명한 인권 변호사 모치즈키 시게요시, 하야카와 렌이 모두 이 사람의 법률 사무소에서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것을 생각해보면 법조계의 누구든 가벼이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과 하이든의 친분이 생긴 것은 재밌게도 히포크리테 살인 사건 때문으로, 보통 이런 만남은 렌이 주도했지만 이번에는 아사이가 하이든을 자신의 법률 사무소로 부른 상황이다. 하이든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면 고등학생 정도의 여학생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이든은 이 학생이 누구인지 짐작은 갔지만 확신을 위해 손가락으로는 학생을 가리키면서 아사이를 바라본 채 물었다.
“누구인가요?”
“내 딸이야.”
“역시 그렇군요.”
“많이 닮았지?”
“네.”
하이든은 학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사이보다 키가 조금 더 크고 검은 머리카락에는 회색빛, 검은 눈동자에는 묘하게 푸른 빛이 돈다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부분이 아사이를 그대로 빼다 박은 모양이었다. 학생은 하이든을 향해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고는 자기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스텔라 스바루 레스트레이드입니다. 19살이고, 스텔라든 스바루든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어제 신문 보고 뭔가 떠올라서 말하러 왔어요.”
당연하게도, 신문과 뉴스는 렌의 변호로 인해 한창 시끄러웠다. 돈을 받은 것도 아닌데 무료로 멤논의 변호를 한다는 기사를 보고 사람들은 렌의 행적을 모두 위선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렌의 행동에 위법한 것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니 말이다. 하이든은 잠시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리고는 곧장 웃는 얼굴로 스텔라에게 인사했다.
“아, 음. 반가워요, 스텔라 양. 하이든 검사예요. 뭐가 떠올랐을까요?”
“렌 오빠가 지금 누가 봐도 혐의가 명확한 사람의 무죄를 주장한다고요?”
38살에게 오빠라고 칭하는 미성년자를 보고 있자니 하이든의 기분이 조금 묘해졌지만, 하이든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스텔라의 말을 경청했다.
“렌 오빠한테 동생이 많은 거 알죠? 동생들을 거의 자식처럼 대하는 것도요. 제가 유우나랑 같은 반이거든요.”
“아, 아끼는 건 잘 압니다. 그보다 유우나 양이랑 같은 반이였군요?”
“네. 제가 맨날 챙기죠.”
렌의 기사나 인터뷰에서도 종종 드러난 사실이지만, 렌이 동생들을 아끼는 것은 하이든이 익히 들어온 사실이었다. 하이든과 만나면 렌은 꼭 동생들 사진을 보여주며 기특하다며 자랑했으니 말이다. 특히 막내 여동생인 유우나의 지분이 상당했다. 부모님과 거의 연을 끊어버린 하이든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긴 했다. 지금 하이든이 신기한 것은 스텔라와 유우나의 인맥이었다.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친한 사이 같은데, 렌에게 들은 유우나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지금 스텔라와는 성향이 조금 안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우나 양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뭘까요?”
“유우나가 학교에 나오지 않아요. 월요일부터 나오지 않았으니까, 닷새네요. 토요일인 오늘까지 포함하면 엿새고요.”
스텔라가 꺼낸 말에 하이든은 잠시 멈칫했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스텔라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말은 체험학습이라고 하는데, 연락 자체가 안 돼요. 이상하지 않아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어떤 범죄자가 유우나를 납치해서, 렌 오빠에게 피고인의 무죄를 받아내라 협박했다면? 그러면 하지 않는 짓을 하는 것도 다 이해가 되잖아요.”
스텔라가 하는 말에 하이든은 머리 속 퍼즐이 모두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렌이 범죄자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도,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는 것도 평소의 렌과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아끼는 동생이 납치되었고, 납치범이 무죄를 요구했다면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 전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확증은 없었다. 유우나가 정말 체험학습을 갔을 경우의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체험학습을 갔을 가능성이….”
“정말 체험학습을 갔다면 친구들에게 미리 말했겠죠. 어디 간다고 말도 안 했는데 갑자기 사라진데다, 연락까지 안 되면 누구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이쯤 되면 하이든은 스텔라의 말이 맞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든의 얼굴이 상당히 솔깃하게 변하자, 아사이가 스텔라의 의견에 쐐기를 박았다.
“남편한테 부탁해봤는데, 유우나의 생활 반응이 안 보인다 하더라고. 유우나는 렌의 부모님 카드 중 하나를 쓰니까 확인해 봤는데, 그것만 학교 결석 전날부터 사용 흔적이 없어. 전화기도 꺼져 있고.”
아사이가 제시한 확실한 증거에 하이든은 확신한 듯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가, 조금 의문스러운 얼굴로 바뀌었다.
“…경찰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했다고요? 그거 공권력 남용 아니예요?”
“무슨 소리야. 이건 엄연히 범죄의 가능성에 대한 확인 수사라고. 그리고 에즈라는 이런 거 잘 들어주니까.”
“그게 공권력 남용 같은데….”
“꼬우면 너도 형사 반려 얻던가.”
하이든이 이의를 제기해봤자 아사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사이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지만 이상하게 하이든의 귀에는 뭔가 다 틀린 것처럼 들렸다. 두 사람의 만담을 잠시 지켜보던 스텔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동생이 그리 좋진 않지만, 그래도 납치되면 최선을 다해 구할 거예요. 아마도. 그런데 렌 오빠랑 유우나는 거의 부모자식 관계라서, 무슨 짓이든 할 것 같거든요. 지금 상황을 고려하면 이게 가장 맞는 것 같아요.”
“부모자식은 원래 그런 건가요? 그러니까, 이해가 잘 안 되네요.”
하이든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생각이 닿기도 전에 튀어나온 말이라 하이든도 당황스럽긴 했지만, 부모의 도구로서 살다 연을 끊은 하이든에게 이런 개념은 상당히 생소한 것이었다. 하이든의 질문에 당황했는지 잠시 할 말을 고르는 스텔라를 아사이는 그저 가만히 쳐다보았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그렇죠.”
“음, 그렇군요.”
한참을 고민한 스텔라의 말에 하이든이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텔라는 뭔가 아니라는 듯 불편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아니라면, 별로 좋은 가정 환경은 아닌 것 같아요.”
“먹이고 돈을 들였는데요?”
“그건 양육자의 당연한 의무고요.”
“음… 그건 좀 신기하네요. 그렇군요.”
“예. 뭐… 그래요.”
하이든이 납득은 하지 못했지만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이자, 스텔라는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에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더니, 아사이는 조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스텔라를 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그보다 스바루. 미나토가 별로야? 네가 바란 동생이잖아.”
“엄마, 원래 남매는 다 이래.”
모녀의 가벼운 대화에 분위기가 풀리자, 그제야 하이든은 친구의 결석과 신문 기사 하나로 그런 결론을 이끌어 낸 스텔라가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핏줄은 숨길 수 없다는 것인지, 얼굴뿐만 아니라 머리도 아사이를 똑 닮은 모양이었다.
“…스텔라 양. 혹시 장래 희망이 탐정이나 경찰인가요? 혹시 변호사는 아니죠?”
“법의학자인데요.”
하이든의 질문에 스텔라는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래의 적으로 만날 가능성이 줄자 하이든은 조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비 오는 날에 먼지 날리듯 탈탈 털어버릴 아사이 같은 변호사와는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 스텔라는 뭔가 찝찝한 듯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렌 오빠를 목표로 한 걸까요? 그리고 왜 그런 악인의 무죄를 바랄까요? 그 사람 주변 사람에게 평이라도 좋았나요?”
“아니, 안 좋았어요. 같이 일 하는 사람들도 친해지고 싶진 않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뭐… 수사망에 파악되지 않은 지인이 있을 수 있긴 하지만요.”
“그런데 용케도 여자친구가 있었네요. 아, 혹시 헤어진다고 하니까 죽인 건가…. 그럼 더 이상하네요. 무죄를 요구할 사람이 없어 보이는데.”
스텔라의 의문에 하이든이 설명하자,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생각하던 아사이가 평온한 목소리로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무죄를 바라는 게 그 사람에게 호의적이란 뜻은 아니지.”
“왜?”
스텔라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아사이를 바라보며 묻자, 아사이는 스텔라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답했다.
“렌의 의뢰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좋은 마음으로 피고인의 무죄를 요구한 게 아닐 수 있다는 거지. 종종 그런 경우가 있거든. 예를 들면, 채무 관계인데 구속되면 돈을 못 받으니까 이 사람이 억울한 것 같다는 핑계로 내게 부탁한 사람도 있었고. 안 들어줬지만.”
아사이는 마지막 말을 하며 어딘가 음침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된 관계보다는 이론으로서 세상의 이치에 대한 이치를 내려온 하이든에게, 호의가 아닌 무죄 요구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었다.
“아무튼, 납치 정황을 발견했으니 비밀 수사에 들어가기로 했어. 유우나는 가능한 빨리 찾았으면 좋겠네. 할 이야기는 끝이야. 월요일이 2차 공판이지? 힘내고, 이겨.”
“…네.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렌과 법정에서 마주했는데, 아사이가 자신을 응원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 하이든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늘 하루 여러가지 새로운 경험을 한 하이든은 조금 느릿하게 검찰청으로 향했다. 뭔가 길이 보일 것도 같았다.
* * *
하이든은 검찰청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걸음을 멈췄다. 빨강은 멈추라는 신호라 하던가, 그렇다면 하이든의 눈에 들어온 붉은 머리 또한 정지 신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든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하야카와 변호사님.”
가만히 서 있던 렌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잠시 움찔하고는 하이든을 돌아보았다. 형용하기 힘든 얼굴로 하이든을 말없이 바라보던 렌은 느릿하게 다리를 움직여 하이든에게 다가오나 싶더니, 그냥 스쳐 지나갔다. 렌은 재판이 시작하기 전 이미 검찰 측에서 받아갈 수 있는 자료는 모두 얻어갔으므로, 렌이 검찰청에 올 이유는 더 없었다. 하이든은 렌이 검찰청 인근에 온 이유에 대해 두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첫째는 무언가 전하기 위해 하이든을 만나러 온 것, 둘째는 하이든을 압박하기 위해 렌의 사법연수원 동기를 만나러 온 것. 평소의 렌이었다면 하이든은 당연히 첫째라고 생각했을 것이지만, 지금의 렌은 명백히 이상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하이든은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식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하이든은 어느새 멀어져가는 렌의 뒷모습에 대고 크게 외쳤다.
“막내 동생분은 잘 계시죠?!”
하이든의 말에 렌은 발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천천히 뒤로 돌아보았다. 놀람과 충격, 두려움이 잔뜩 얽힌 렌의 표정에 하이든은 어쩐지 얼굴에 웃음이 배어 나왔다. 하이든에게 성큼성큼 다가온 렌은 조금 험악한 얼굴을 한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냥 안부를 물었을 뿐입니다. 보아 하니….”
하이든은 시선만 살짝 아래로 한 채 렌을 쳐다보았다. 간만에 보는 광경에 만족감이 하이든의 등골을 타고 올랐다. 아무리 반성을 하고 변했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 몸에 배인 것은 쉽게 바꾸지 못하는 법이다.
“상황이 안 좋으신 것 같네요.”
하이든의 오만에 가득 찬 목소리에 렌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하이든의 새까만 눈동자는 렌을 여전히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렌은 이번에 하이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내가 멍청했지. 당신이 변했을리가.”
“굳이 그리 멍청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별은 이미 아니까요.”
하이든의 말에 렌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 하이든이 잘 하는 것들은 많았다. 남이 먼저 하이든이 원하는 것을 내놓도록 하는 것, 말에 분위기와 정반대의 메시지를 담아두는 것. 렌은 방금 하이든의 도발에 ‘내가 멍청했다’고 했다. 이는 렌이 검찰청 인근에 있던 이유가 첫번째 가정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납치범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수사권을 가진 검사인 하이든이 렌과 친근한 표현을 보여봤자 득이 되지 않는다. 첫 공판 때, 렌이 하이든을 위버 검사라고 부른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든이 렌에게 전할 말은 유우나의 납치에 관한 수사가 들어갔다는 말이다. 유우나의 친구이자 아사이의 딸, 스텔라. 그 이름이 별을 의미하는 걸 렌이 모를 리가 없다.
“변호사님의 태도, 모순, 발언. 이제 전부 이해합니다.”
하이든이 조금은 가라앉은 얼굴로 렌에게 한 발 다가가자, 렌은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뒤로 물러났다. 하이든은 차분한 목소리로 마저 남은 말을 했다.
“변호사님의 신념, 꺾지 마세요. 꺾지 않아도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꺾지 말라는 소리는 무책임한 것이고,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모순적이게도 이 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렌이었다. 이 말들을 수없이 내뱉은 사람으로서, 말의 허무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탓이다. 그래서 렌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지만, 과연 하이든이 할 최선의 행동이 어떨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2차 공판에는 1차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기자의 수가 지난 번보다 늘어 있었고, 그저 구경하러 온 민간인도 많았다. 그 중에서 하이든에 눈에 띄는 사람은 세 명이었다. 처음은 피고인에 대한 평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지인, 방청석 중간에 앉아 모자를 푹 눌러쓴 상태였다. 두번째로 피해자의 어머니, 여전히 방청석 가장 안쪽 구석에 앉아 무감각한 얼굴로 법정을 바라보는 채였다. 마지막은 피고인의 남동생으로, 방청석 중간에 앉았던 저번과 달리 방청석 맨 뒤쪽에 앉아 있었다.
“재판을 재개하겠습니다. 검사측, 발언하세요.”
판사의 말에 하이든은 방청석에서 관심을 거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범인이 누구인지 고민할 때가 아니라 재판에 집중할 때였다.
“증인을 신청합니다. 최초 발견자 디커 리스버 레탄입니다.”
하이든의 말에 따라 방청석에서 젊은 여성이 한 명 걸어 나왔다. 키는 조금 작은 편이었지만 눈빛이 단단하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디커는 증인 선언을 하고는 증인석에 바로 앉았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레탄 씨.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사건 발생일에는 몇 시에 퇴근하셨습니까?”
“그날은… 야근 때문에 9시 반에 퇴근했습니다. 집에 오니 10시 반이 조금 안 되었고요.”
디커는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이든은 잠시 기다리더니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때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음… 빌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앞에서 들렸어요. 놀라서 가까이 가보니까 사람이 떨어져 있더라고요. 신고한 뒤에 괜찮은지 살펴보니까, 평소 이피가… 이피네가 자주 하던 목걸이가 보였습니다.”
“어두웠을텐데 그게 어떻게 보였나요?”
“휴대전화에 탑재된 플래시를 켜서 살폈습니다.”
“그렇군요. 방금 피해자를 애칭인 ‘이피’라고 부르셨는데, 두 분은 평소 교류가 잦았습니까?”
“네. 나이가 비슷하고 같은 층에 살다 보니 마주칠 일이 잦았어요.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혹시 피해자에게 받은 부탁이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하이든의 질문에 디커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증언했다.
“…자주 제 집에서 재워줬어요. 남자친구가 때린다고. 그러면 저 사람… 피고인이 자주 제 집 문을 두드리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헤어지라고도 하고, 경찰에도 신고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혹시 피해자의 남자친구, 즉 피고인이 뭐라 소리를 질렀나요?”
“’그 년 안 내놓으면 너도 죽여버린다’… 고 했습니다.”
“네, 증언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방금 증인은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것을 입증해주었습니다. 또한 피고인은 피해자를 보호하던 증인에게 ‘너도’ 죽여버린다며 협박을 일삼은 것으로 볼 때, 이미 피고인의 폭행에 살인의 의지가 담겨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상으로 발언을 마칩니다.”
하이든은 심문을 마치고 뒤로 돌아 하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변호인 측, 증인 심문하세요.”
판사의 말에 따라 이번엔 렌이 심문하기 위해 증인석 앞으로 나섰다. 렌의 얼굴을 보고 디커가 조금 몸을 움츠리자, 렌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증인. 피해자를 보호했다고 하셨죠.”
“네, 경찰에 신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피해자 폭행 건으로 경찰에 입건된 게 하나도 없네요?”
렌의 질문에 디커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금방 떨리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이피네가 다음엔 안 그런다고 약속했다며 계속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왜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신고자일 뿐, 이후 처분은 피해당사자의 의지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돕고 싶었지만, 의지가 워낙 강해 설득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돕고 싶어 했습니까?”
“예?”
“뭔가 다른 의도가 있던 것은 아닙니까? 금전이든, 애정이든요.”
하이든은 디커를 향한 렌의 질문에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졌다. 저런 질문은 과거의 하이든이나 할 법한 질문이었다. 상대가 반응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져, 반응하면 그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논리에 적용하는 전략이다. 하이든은 과거 그런 식으로 많은 재판을 승소로 이끌었다. 물론 그 중 이 전략이 먹히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무례하시네요.”
디커는 렌을 쏘아보며 무척이나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떤 의도가 있었든, 그것과 이피네가 폭행을 당한 건 명백히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의도가 있긴 했다는 뜻인가요?”
“네. 이피네가 저런 폭행범과 헤어지고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의도요.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연민이라는 의도 말입니다.”
디커의 말에 렌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하이든은 지금 렌이 느낄 감정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했다. 하이든이 위니스나 오큘러스를 증인 심문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렌과 하이든이 일치하는 감정은 오직 당황스러움뿐일 터였다. 당시 하이든에게 큰 감정은 분노와 역겨움이었지만, 아마 렌은 지금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심문을 마치겠습니다.”
“네. 그럼 변호사측, 발언하세요.”
“…증인을 신청하겠습니다. 피해자와 같은 빌라의 거주민, 언서트 에인 포마입니다.”
렌의 말에 방청석에서 느릿한 걸음으로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걸어 나왔다. 하이든이 보기에는 어쩐지 옛날의 자신과 분위기가 많이 비슷해 보였다. 언서트가 증인 선언을 하고 자리에 앉자, 렌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네, 포마 씨. 포마 씨는 몇 층, 몇 호에 거주하시죠?”
“2층, 205호에 살죠.”
“피해자는 5층 501호에 거주하는데, 어떻게 아시는 사이입니까?”
“고작 빌라 층 수 다른 걸로는 안 되죠. 이런 낡은 동네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람들이 다 알아요.”
“그럼 피해자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렌의 질문에 언서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듯이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약간 웃는 낯으로 말했다.
“자기 친구 데려오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남자친구가 친구 데려오면 그렇게 남자친구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대요. 그런데 평소에도 짜증은 기본이고, 심지어 칼 들고 협박까지 했다는 소리도 있어요.”
“그렇다는 건 피고인의 폭력 행위 이전에 피해자의 원인 제공이 있었다는 뜻이네요? 혹은 과잉 대응의 가능성도 있다는….”
“이의 있습니다. 지금 변호사는 피해자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하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게 외쳤다. 소문이란 것은 무척이나 유동적이고, 진위성이 불확실한 것이다. 진실에 기반한 소문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퍼트리기도 하니 말이다. 소문이라는 단서로 피해자와 피고인의 평소를 짐작하게 된다면 판사들은 명백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힘들어진다.
“기각합니다.”
그러나 하이든의 이의는 기각되었다. 부장판사는 아무래도 소문의 경우 중 전자에 조금 더 무게를 두는 듯, 하이든의 발언에도 조금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질문이 기각되자 렌은 하이든의 말에 막혀 끊어진 말을 마무리했다.
“…과잉 대응의 가능성도 있다는 뜻일까요?”
“아무래도 그러지 않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심문을 마칩니다.”
“검사측, 심문해 주세요.”
렌이 자리에 들어가 앉자, 하이든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증인에게 좋게 대해야 하는 것은 알았지만, 하이든은 차마 제대로 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그것을 사실인 양 퍼트리는 게 자신의 과거와 똑 닮았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포마 씨.”
“네.”
언서트는 지금이 그저 재밌다 느끼는지 여전히 웃는 얼굴로 하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익숙한 미소에 하이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방금 증언하신 것 중, 직접 목격하거나 혹은 직접 들은 게 얼마나 됩니까?”
“…어, 그러니까.”
싸늘한 목소리 때문인지 하이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당황한 기색의 언서트에, 하이든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장 파고들었다.
“전부 소문으로 들은 것입니까?”
“…예.”
하이든은 차마 한숨을 쉬지는 못하고, 조용히 길게 숨을 내뱉고는 뒤로 돌아 재판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판장님, 변호사측 증인의 증언은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닌, 모두 진위여부가 불확실한 소문에 의한 이야기입니다. 이 점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심문을 마칩니다.”
하이든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던 부장판사는 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변호사, 발언은 이상입니까?”
“예, 이상입니다.”
“그러면 휴정하겠습니다. 모두 최종 공판 때 뵙겠습니다.”
판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법정을 떠났다. 여전히 소란스러운 법정 한가운데에서 하이든은 받아들였다. 다음 공판에서, 피고인의 유무죄가 결정된다.
* * *
“잘 하시던데요.”
하이든은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젠 새까맣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죽어버린 눈을 한 렌이 하이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이든은 한참이나 렌을 바라보다가 약간 가시 돋힌 목소리로 말했다.
“…하야카와 변호사가 듣고 싶은 말 아닌가요?”
“그럴지도요.”
하이든의 말에 렌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검찰이나 세상의 어떤 압박에도 제 신념을 꺾지 않던 하야카와 렌이란 사람이 고작 가족이란 것 때문에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하이든은 장시간의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하야카와 변호사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제가 이길 것 같습니까?”
“예전 그대로였다면 검사님이 승소했겠지요.”
“누가 말입니까?”
“글쎄요.”
렌은 두루뭉술하게 말을 마무리했지만, 하이든은 렌의 말이 주어가 둘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렌이 신념에 따라 피해자에 대한 존중이나 증거의 진실성 등을 계속 유지했다면 렌은 패소했을 것이다. 반대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고, 아버지와 엮이기 싫어 위버가 아닌 하이든 검사로 부르기를 요구하면서도 재판 때 혈연을 이용하던 모습 그대로였다면 하이든이 승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과거와 전혀 달랐다. 렌은 외부 영향이라도 자신의 신념을 저버린 상태고, 하이든은 더는 허위 자백도 혈연도 이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달라진 지금 바라볼 수 있는 미래는 불투명했다. 하이든은 렌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렌 씨는 믿습니까?”
“누굴 말입니까?”
“글쎄요.”
렌도 하이든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을 터였다. 멤논과 납치범, 두 사람 모두에 대한 이야기였다. 렌은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죽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믿어야죠. 변호사는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죄가 있든 믿어야 하죠. 그 믿음의 대가가 어떠하든, 믿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신념을 저버린 상태에서도 여전히 변호사로서의 책임은 지는 모습에, 하이든은 그런 렌이 예전보다 더 괴물처럼 느껴졌다. 과거에는 적어도 사념이 뭉쳐 만들어진 것 같았다면, 이젠 그냥 변호라는 것 자체만 남아 굴러가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증기 기관차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플랫폼에 부딪혀 전부 반파해버릴 기관차 말이다. 하이든은 숨을 들이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사는 의심하는 사람이죠. 저는 계속 의심하겠습니다.”
하이든이 의심하는 것은 많았지만, 그 의심 가운데 확신에 가까운 것이 있다면 렌이 멤논을 믿을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자신을 곧게 바라보는 하이든의 검은 눈동자에 렌은 잠시 빤히 그 눈을 바라보더니, 무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피곤해도 법정에 서는 게 법조인이니까요.”
하이든의 말에 렌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렌은 이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목소리로, 이곳과 멀지 않은 법정에서. 자신이 한 말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돌려받는 기분은 무척이나 기묘하고, 변해버린 자신에 대한 경고 같아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먼저 밖으로 나가는 하이든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렌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최종 공판. 믿다
최종 공판을 하루 앞둔 날, 하이든은 여느 때와 달리 아사이 법률 사무소로 향했다. 유우나의 행방, 그리고 최종 공판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서였다. 법률 사무소의 문을 열자 사람들이 보였다. 전에 마주해봤던 사람 둘, 사진으로만 봤던 사람 하나, 그리고 아예 처음 보는 사람 하나. 마주했던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렌의 선배 변호사들이다. 어깨보다 조금 더 긴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검은 눈의 재심 전문 변호사 아사이 나나미. 아사이와 달리 짧은 갈색 머리에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변호사보다는 군인에 가까워 보이는 갈색 눈의 인권 변호사 모치즈키 시게요시. 아사이는 한쪽 손을 가볍게 들어 하이든을 반겨주고, 모치즈키는 조금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슬쩍 숙여 인사했다. 하이든이 간접적으로 본 적 있던 남자는 흉터가 크게 진 입에 살짝 미소를 띠며 하이든에게 물었다.
“위버 검사님?”
“하이든 검사라고 불러주세요. 음… 그러니까, 에즈라 씨?”
“아시네요?”
“예전에 아사이 씨가 사진을 보여 주셨어서.”
“그렇구나, 직접 보는 건 서로 처음이네요. 반가워요, 에즈라 레스트레이드입니다.”
손을 내미는 남자는 형사이자 아사이의 남편인 에즈라, 하이든보다 더 밝은 회색 머리에 오묘한 청회색 눈동자는 전에 만난 스텔라의 어렴풋한 색감이 어디서 왔는지 바로 알게 해주었다. 하이든은 에즈라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수사 진행을 알려주시려 오신 건가요?”
“예, 그렇죠.”
“그런데… 여기 이 분은 누구세요?”
하이든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하이든이 아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키가 아주 작고, 이목구비가 토끼와 닮았다는 인상이 강했다. 웨이브 진 긴 머리나 눈동자 모두 검은색인 걸로 봐서는 아사이나 모치즈키와 비슷한 곳의 이민자나 그 2세 같았다. 하이든의 물음에 모치즈키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아내야.”
모치즈키의 발언에 하이든은 모치즈키를 조금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모치즈키도 액면가는 실제 나이보다 젊은 편이었지만, 지금 아내라고 소개한 사람은 아무리 많이 쳐도 모치즈키보다 최소 7살은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하이든은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분 나이차가?”
“4살인데….”
“아, 실례했습니다.”
“아하하!”
“재은아….”
하이든이 머쓱하게 사과하자 모치즈키의 아내는 재미 있다는 듯 폭소했고, 모치즈키는 놀림이라도 당한 듯 약간 울상이 되었다. 모치즈키가 재은이라 부른 아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든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헬렌 재은 영이라고 해요. 오늘은 쉬는 날이라 심심해서 따라와봤어요.”
“네, 헬렌. 반가워요. 하이든 위버라고 합니다. 하이든이라 불러주세요.”
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하이든이 빈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아사이가 하이든에게 질문했다.
“지금 렌에 대한 비난 여론이 엄청나던데. 지금 어디까지 했어?”
“피고인이 폭행한 건 맞지만 심각한 폭행은 피고인의 행위가 아닐 수 있다, 문이 열려 있기에 외부인이 충분히 출입할 수 있다, 피해자가 피고인을 먼저 도발했다, 이 정도입니다. 사실 이 정도면 렌 씨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해요.”
“음…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러면….”
하이든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고는 아사이와 공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갔다. 아사이와 하이든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모치즈키는 조금 복잡한 얼굴을 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였으면 그걸로 안 끝나.”
모치즈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모치즈키에게 쏠렸다. 아무리 아사이가 유능하다고 해도, 렌이 아사이 사무소에서 파트 타임을 할 때부터 렌을 가르치다시피 한 것은 모치즈키였다. 그러니 렌의 사고, 전략 같은 것에 훨씬 더 익숙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나였으면 피해자에게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할 거야.”
“아, 그렇겠네. 그건 아예 생각도 안 해도 됐는데.”
“도덕적 결함?”
깜빡했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채 탄식을 섞어 말하는 아사이와 달리, 이곳에서 법과 조금 거리가 먼 헬렌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모치즈키는 살짝 미소를 띠며 헬렌에게 말했다.
“바람을 피웠다거나, 일상 생활이 문란했다고 하는 거지.”
“그런데 그거랑 그 개자식이 사람 팬 거랑 무슨 상관이야?”
헬렌은 귀여운 목소리와 달리 상당히 험악한 어휘를 입에 담았다. 하이든이 잠시 충격 받은 것도 잠시, 다른 이들이나 모치즈키는 익숙한 듯 평온한 얼굴 그대로였다.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죄가 감경되거든. 배우자나 애인의 바람은 판례에서 타당한 사유로 보는 경우가 많아.”
“썅.”
아사이의 대답에 헬렌은 썩은 얼굴로 하이든이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욕이 분명한 한 글자를 내뱉었다. 하이든은 등에 돋은 소름을 갈무리하고 아사이를 향해 물었다.
“…렌 씨가 설마 그럴까요?”
“평소의 렌이라면 안 그러겠지. 나도 그래서 예상가는 대응에 모치즈키가 말한 부분을 넣지 않은 거고. 그런데, 애초에 지금 근거로 든 것들이 전부 렌이 할 말이야?”
“…아니죠.”
단번에 반박하는 아사이에 하이든은 곧장 조용해졌다. 신념을 잃어버린 채 행동하는 렌은 무척이나 무서운 사람이었다. 사무소에 침묵이 내려앉자, 헬렌은 조금이라도 소리를 만들고 싶은 듯 에즈라에게 물었다.
“에즈라 씨, 수사는 어떻게 되어가요?”
“안 좋은 소식이지만, 유우나 찾기가 쉽지 않아요. 유우나 양이 사라진 건 하교길, 이번 사건이 벌어진 동네죠. 재개발 논의가 진행중이라서 CCTV가 없는 곳인데다, 유우나 양 전화기 전원이 꺼져 있어서 추적이 힘들어요.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찾을 수는 있을 텐데, 최종 공판이 내일이라….”
“…납치범의 방향을 하나로 정한 뒤 수사하면 안 되는 겁니까?”
“물론 그 생각도 해봤지만, 유우나 양의 가족들이 수사에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는 상황이라 납치범의 요구나 목적을 명확하게 알 수 없어요. 만약 피고인에게 우호적인 쪽이라 가정했는데, 그 반대라면 수사의 시간을 버리는 꼴이 됩니다. 피고인이 아는 사람들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상당히 많아서 톺아보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상황이고요.”
이어진 모치즈키의 질문에 에즈라는 골치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CCTV에 걸리지 않게 납치했다는 말에 하이든이 전문 인신매매범의 소행인가 고민하던 찰나, 에즈라는 조금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한 건 납치범은 납치 장소 인근에서 오래 산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예? 왜죠?”
”납치 장소는 유우나 양의 하교길입니다. 정확히 유우나 양을 납치하기 위해서는 렌의 가족을 알고, CCTV의 위치를 알고 찍히지 않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전문 인신매매범들은 웬만하면 찍혀도 잡히지 않도록 도주하지, 아예 흔적을 안 남기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멤논의 지인들이 죄다 그 인근에 살고 있어서 도움되는 정보는 아니예요.”
“…그렇군요.”
에즈라의 말에 하이든은 깨달았다는 듯 조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 이후, 남은 최종 공판에 대한 전략을 조금 더 세운 뒤 하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모두 감사했습니다.”
“어, 가봐.”
아사이는 하이든이 들어올 때처럼 한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반면 모치즈키는 하이든을 조용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겨.”
“…네.”
누가 봐도 렌의 편인 사람에게 응원을 받으니, 하이든은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평생 보편적인 상식과는 조금은 거리 있게 살아온 하이든이었지만, 이런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비상식을 경험을 할 때마다 하이든은 조금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하이든은 모치즈키를 향해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아사이 사무소 밖으로 나왔다. 하이든이 향할 곳은 당연히, 검찰청이어야 했다. 그러나 하이든은 아사이의 사무소 밖으로 나와 검찰청 쪽으로 움직이나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을 돌렸다. 하이든은 그동안의 이야기에서 발견한 하나의 답을 확인하기 위해서, 유우나가 납치당한 곳이자 사건이 벌어진 동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하이든은 어느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 자리했다. 겨울에 해질녘인 것을 고려하면 바람도 적게 불어 밖에서 커피를 마시기에 아주 좋았지만, 정작 하이든이 마시는 것은 달달한 초콜릿 라떼였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은 하이든의 옆에 앉은 누군가로, 그래도 겨울 저녁인데 옷을 꽤나 얇게 입은 채였다.
“커피 맛은 어떠신가요?”
“맛도 그렇지만, 향이 아주 좋네요.”
“다행이네요. 제 단골집이거든요. 사실 여긴 디저트가 맛있는데, 하나 드시겠습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하이든이 웃으며 물었지만, 상대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슬슬 어두워지는 거리에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자, 하이든은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속 생각했습니다. 가족조차 포기한 그 사람의 무죄가 필요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계속 생각하다 보니 결국 답이 나왔습니다.”
하이든의 말에 옆 사람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멈췄다. 온화하게 불던 찬바람도 순식간에 그쳐 모든 것이 정적에 휩싸인 가운데, 하이든은 옆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하필 렌 씨였습니까?”
“…전에 잡지에서 인터뷰를 본 적 있어요. 동생들을 거의 자식처럼 키웠다고. 길을 오가면서 붉은 머리 학생들을 종종 봤는데, 그런 피 같은 붉은색이 흔한 게 아니니까 그 동생들이구나 싶었죠.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변호사를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짐을 옮기는 걸 도와달라 하니 아무 의심도 없이 도와주더군요. 착한 아이예요.”
한참이나 고민하나 싶더니, 너무도 쉽고 평온하게 말하는 상대에 하이든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이든은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지금 렌 씨에게 어떤 비난이 쏟아지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 압니다. 끝나면 전부 자수할 거예요. 그럼 변호사님의 불명예도 해소되겠죠.”
“그리 간단하게 해결될 리 없습니다. 유우나 양은 어디 있습니까? …설마.”
“말조심하세요. 학생은 잘 있으니까.”
매섭게 노려보는 상대에 하이든은 한참이나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미 짐작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하이든은 확인해야 했다.
“…피고인이 무죄를 받으면 어쩌실 생각이었습니까?”
“어쩔 것 같나요?”
“….”
이미 답을 알고 있던 하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굳이 무죄를 받아야 하는 이유, 아주 조금의 지체도 없이 피고인이 사회로 나와야 하는 이유.
“내 딸은 싸늘하게 식어갔는데, 저 놈은 감옥 안에서 편하게 사는 건 말이 안 되죠.”
추락 사건 현장이자 유우나 납치 현장 인근에서 오랜 세월 살아왔고, 피고인이 의미 없는 죗값을 치르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뿐이다. 피해자의 어머니, 네스트라는 분노 어린 눈으로 하이든을 쳐다보았다.
“주정뱅이 남편과 이혼하고 나의 모든 걸 바쳐 내 딸을 키웠어요. 내 딸의 미래와 나의 삶을 단번에 앗아간 것에 비해, 목숨 하나면 싼 거 아닌가요?”
“…유우나를 풀어주세요.”
하이든은 그저 유우나를 돌려달라 할 뿐이었다. 현실의 윤리나 지식에 대한 것은 하이든에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렌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고, 무척이나 괴로워한다는 것만이 하이든에게 중요했다. 네스트라는 하이든의 시선을 피하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멤논의 무죄가 확실하지 않아요.”
“렌 씨에게 유우나 양은 딸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렌 씨는 자기 자식의 생사도 모른 채 싸우고 있어요.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가며 싸우는 중이란 말입니다. 렌 씨가 어벤지 씨에게 잘못한 건 전혀 없잖아요. 그런데 왜 렌 씨가 당신과 같은 고통을 겪게 만드는 겁니까?”
“….”
하이든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다는 듯 네스트라는 입을 그대로 다물었다. 네스트라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이걸 남의 입에서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올 터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조용해진 네스트라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이든은 고민하는 네스트라에게 쐐기를 박기 위해 상식에 기반한 마지막 말을 꺼냈다.
“어벤지 씨의 복수를 막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남에게 고통을 줘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정말 막지 않을 건가요?”
“네?”
하이든이 네스트라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네스트라는 슬픔과 분노가 뒤엉킨 눈으로 하이든을 노려보며 물었다.
“검사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거냐는 말입니다.”
네스트라의 말에 하이든은 한참을 입을 다물었다. 아마 정의롭고 준법의식이 투철한 렌 같은 사람이라면 네스트라를 말렸을 것이다. 어쩌면 죽은 딸이 이렇게 복수하는 것을 원하겠냐는 뻔한 말로 설득을 하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하이든은 달랐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것도, 어떻게 해서든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은 마음도 알았다. 이성은 범죄자의 정당한 처벌을 요구했지만, 마음은 유족의 복수를 인정했다. 삶과 지식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하이든은 겨우 입을 열었다.
* * *
최종 공판의 날, 하이든은 방청석에서 네스트라를 발견하지 못한 채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은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1, 2차 공판에서 제시했던 증거와 주장을 다시 점검하듯이 재판의 내용은 흘러갔고, 하이든의 우려처럼 피해자의 도덕성에 대한 지적은 렌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만 렌이 말을 할 때마다 자꾸 멈칫하는 것을 보니, 렌이 도덕성에 대한 지적을 할지 말지 여즉 고민하는 중이라는 걸 하이든은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젠 최종 변론만이 남아, 하이든이 먼저 발언을 할 차례였다.
“검사측, 최종 변론하세요.”
하이든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청석을 바라봤지만 여전히 네스트라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하이든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부장판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오빠!!”
그 순간, 방청석 쪽에서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까지 부장판사를 바라보던 렌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고, 어느새 법원 경위에게 제지되는 어떤 소녀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치 염색한 것처럼 새빨간 붉은 머리, 렌과 다르지 않은 머리색이었다.
“…유우.”
“잠시만, 변호사! 멈춰요!”
렌은 뭐라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청석 쪽으로 뛰쳐나갔다. 판사가 제지해도 렌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곧장 소녀에게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고는, 금방 떼어내 소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붙잡고 물었다.
“유, 유우 쨩.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응. 나 멀쩡해.”
“이, 이, 이상한 야… 약이나 음식을 먹진 않았고? 어, 어디….”
“나 아무 일도 없었어. 나 진짜 괜찮아, 렌 오빠.”
“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하이든의 눈에는 렌의 뒷모습만 제대로 보였지만, 얼핏 들리는 그의 작은 목소리가 몹시도 물기에 젖어 떨리는 상태라는 것은 인지할 수 있었다. 그나마 환히 웃는 붉은 머리 소녀에 하이든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는, 표정을 굳혀 부장판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상황에 대해 변호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확인해볼 수 있습니까?”
“인용합니다.”
“하야카와 변호사님. 동생분이 ‘납치’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입니까?”
하이든이 일부러 납치라는 부분을 강조하며 말하자, 방청석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법정의 일부를 채웠다. 렌은 눈물 범벅인 얼굴로 하이든을 쳐다보고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사실입니다.”
“그분은 납치되었던 동생분이고요?”
“네.”
“납치범이 요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피고인의 무죄입니다.”
하이든의 질문에 대한 렌의 답에 방청석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지고, 키보드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이 정도면 분명 기자들은 특종을 잡았다며 누가 먼저 기사를 내는지 경쟁을 시작할 것이다. 재판의 내용은 둘째 치더라도, 적어도 자의적으로 죄가 명백한 이의 변호를 맡았다는 사실은 중화될 것이다.
“예, 이상으로 질문을 마치겠습니다. 재판장님, 다시 재판을 재개해주십시오.”
“모두 정숙해주세요. 변호사, 다시 법정 안으로 들어오세요. 재판을 재개하겠습니다.”
협박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렌이 지금 당장 변호를 그만 둘 수는 없었다. 피고인의 이익, 협박의 증명, 그로 인한 여러 법적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유우나가 돌아오고, 협박이라는 것을 밝힌 이상 렌은 이제 최소한의 신념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의 명예를 지키는 그런 신념 말이다.
“렌.”
“레스트레이드 씨.”
“유우나는 나한테 맡겨. 가봐. 유우나 양, 수사에 협조해 주셔야 겠어요.”
에즈라의 말에 렌은 고개를 끄덕이고, 느릿하게 다시 법정 안으로 향했다. 다시 변호인석으로 가기 전 슬쩍 방청석 쪽을 돌아보자, 유우나가 밝은 얼굴로 렌에게 손을 살짝 흔들고는 에즈라를 따라 문 밖으로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완전히 안심한 렌은 편안한 마음으로 변호인석에 설 수 있었다.
“검사측, 최종 변론하세요.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것은 피고인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냐입니다. 피고인은 이미 수많은 죄를 저질렀고, 이번에도 같은 행위를 반복했습니다. 반복되는 범죄를 두고 본다면 사회의 공익이 현저하게 훼손될 것입니다. 부디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주시길 바랍니다.”
하이든은 발언을 마치고 판사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부장판사는 그런 하이든을 빤히 쳐다보다, 렌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변호사측, 최종 변론하세요.”
“…검사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피고인의 죄를 생각해야 합니다. 피해자가 도발했어도 폭행은 과도한 대응이고, 피해자의 삶이 어떠했든 피고인의 행동에 면죄부가 부여되지는 않습니다.”
렌의 발언에 하이든은 그제야 완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 렌이 피해자의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할 기회는 방금이 마지막이었다. 그럼에도 렌은 피해자의 삶이 피고인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걸 못박으면서, 어떤 불안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피고인의 죄뿐만 아니라 피고인의 삶 또한 생각해야 합니다.”
더는 무죄를 주장할 필요가 없음에도, 렌은 변호인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이번 사건의 재판 중 가장 확신과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의 렌에, 하이든은 자연스럽게 렌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었다.
“재판은 무조건 높은 형량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고인이 저지른 죄는 어떠합니까? 피고인이 사람을 때린 것을 확신할 수 있어도, 사람을 죽였다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렌의 변호를 듣던 하이든은 자기도 모르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정답을 중얼거렸다.
“법이니까….”
“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고인의 삶을 위해 타당한 처벌만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발언을 마치겠습니다.”
발언을 마친 렌은 후련한 얼굴로 변호인석에 앉았지만, 멤논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렌을 쳐다보는 채였다. 렌은 마지막까지 어떤 변호사 윤리도 어기지 않았고, 인권 변호사로서 자신이 세운 윤리의 마지막 선을 넘지 않았다. 하이든은 자신이 이 사실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잠시 휴정하고, 판결하겠습니다.”
휴정 선언에 판사들과 멤논이 자리를 비우자, 나란히 법정에 남은 렌과 하이든은 아주 오랜만에 서로를 제대로 마주보았다. 다시 예전처럼 빛나는 렌의 눈을 보며 하이든이 가볍게 웃자, 렌도 그런 하이든을 따라 웃어 보였다. 그리 길지 않은 휴식 시간이 끝나고, 법정에 들어온 부장 판사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판결문을 읊었다.
“판결하겠습니다. 피고인이 피해자를 빈사 상태에 이를 때까지 폭행했을 개연성이 매우 크며, 경찰의 체포 당시 피고인은 수면을 취하던 등 빈사 상태의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방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피고인을 창문에서 밀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점, 방치의 의도성을 확신할 수 없는 점. 그리고 범행을 반성하고 있는 점을 들어….”
이쯤 되면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이, 피고인의 형량은 높지 않을 터였다. 너무 가볍게 느껴질 정도의 처벌, 딱 그 정도일 것이다.
“피고인에게 5만 달러의 벌금을 선고한다.”
“5만?!”
예상대로 몹시 가벼운 처벌이 내려졌지만, 멤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화가 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을 죽였는데도 벌금형으로 끝난 것이 기쁘기는커녕 5만 달러를 내야 한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렌은 선고를 듣고는 조심스레 방청석으로 고개를 돌려 네스트라의 얼굴을 찾았지만 법정 그 어디에서도 네스트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열흘 남짓한 시간, 누군가에겐 그토록 길었던 재판이 허무하게 끝났다.
* * *
“어이!”
법정 밖에 서있던 렌의 뒤쪽에서 누군가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렌은 곧장 미간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 잔뜩 분노한 얼굴의 멤논이 성큼성큼 렌을 향해 다가와 렌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이거 항소해야지, 안 그래? 왜 내가 5만이나 내야…!”
“당신 항소는 내가 안 맡습니다.”
“뭐?”
렌의 단호한 대답에 멤논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하자, 렌은 약간의 경멸이 담긴 얼굴로 멤논을 그대로 올려다보며 말을 짓씹듯이 말했다.
“제 책임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제가 당신을 맡을 이유는 없으니, 알아서 하세요. 변호사의 책임을 다해 마지막 조언을 한다면, 검찰은 분명 항소할 겁니다. 항소심 맡을 변호사를 찾는 게 좋겠네요. 그리고, 앞으로는 조금이나마 사람처럼 사세요.”
“뭐? 이런 씨….”
멤논이 렌에게 폭력을 가하기 위해 손을 들어올리자, 누군가 멤논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멤논이 이에 대해 뭐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경찰공무원증이었다.
“에즈라 레스트레이드 경감이다. 방금 폭행죄 재판이 끝났는데, 다시 법정에 들어가고 싶나?”
“레스트레이드 씨.”
에즈라는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멤논에게 경고하고 손목을 거칠게 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약간 놀란 눈치의 렌에게 다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렌, 유우나 데려가야지. 그리고 납치 사건 관련해서 네 진술도 필요한데, 시간 되지?”
“아, 네.”
에즈라의 말에 렌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즈라와 함께 법원 주차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렌의 뒷통수에 구멍이 뚫릴 듯이 노려보던 멤논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바닥에 침을 뱉었다.
“…씨발. 씹선비 새끼. 지가 뭐라도 돼? 씨발 새끼. 5만이나 내게 했으면 A/S를 해줘야 할 거 아냐.”
멤논은 무척이나 화가 가득 찬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이미 전과가 가득한 그가 벌금형을 선고받은 것은 판사가 만인의 지탄을 받을 정도로 가벼운 처벌이었지만, 멤논은 여전히 이 금액이 과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 넣고는 건들대며 사건 현장이자 자신이 얹혀 살던 죽은 여자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어느새 밖에 나온 하이든은 휘적대며 걸어가는 멤논의 뒷모습을 어둑한 눈으로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제대로 된 검사는 못 되나 봅니다.”
사실 렌은 이번 재판에서 윤리적으로 비판받을 행동을 했을 뿐, 마지막까지 위법한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물론 윤리를 저버리는 것이 렌의 신념과 반하는 일이긴 했지만, 적어도 법을 지키는 게 하야카와 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이었을 것이다. 너무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하이든에게 렌의 선은 너무도 무거운 것이었다. 물론 이제 하이든은 진실을 추구하고, 더 이상 억울한 이에게 누명을 씌우는 짓은 하지 않지만 렌 같은 사람은 절대 될 수 없었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든이 검사이기 때문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지만….”
판사와 검사는 일 사(事), 변호사는 선비 사(士). 직업의 의미처럼 렌은 변호사로서 공사 구분 없이 어디서든 바른 일을 추구하며 살아갔다. 렌의 선이 무겁다고 하이든이 표현한 것은 이런 맥락이었다. 렌과 달리 하이든에게 삶과 검사라는 직업은 완전히 별개다. 그렇기에 하이든은 일이 아니라면, 무척이나 인간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이든은 고개를 들어 해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숨겨주려는 듯 무척이나 어두운 하늘이었다.
“이건 하늘도 돕네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검은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하이든은 금방 고개를 내리고 걸음을 옮겼다. 흰 눈은 흔적과 소리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잡아먹을 터였다. 결국 피고인에 대한 검찰의 항소는 인용되지 않았다. 사유는 단순했다.
기각
피의자 사망으로 공소권 없음. 끝.
판결문
연말, 추위가 더욱 거세질 즈음 익숙한 두 사람이 카페 안에 나란히 앉아 창 밖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평일이라 그런 것인지, 연말인 점을 감안해도 거리는 상당히 한산한 편이었다. 부드러운 주황빛 조명이 비추는 카페 안은 바깥이 한겨울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온화한 온도였지만 두 사람이 마시는 것은 모두 따듯한 음료였다.
“음, 여기 커피 맛있네요.”
“그렇죠? 여기는 사실 디저트가 맛있는데.”
“케이크 드실래요?”
“괜찮아요. 금방 가봐야 해서.”
“며칠 뒤면 크리스마스인데 바쁘시네요.”
“안 바쁜 날이 없죠. 렌 씨도 마찬가지 아니세요?”
“아무래도 그렇죠. 크리스마스 당일은 시간을 내야 할텐데.”
하이든과 렌, 두 사람은 카페 조명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하이든은 초콜릿 라떼를, 렌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거리를 바라보았다.
“겨울인데 날씨가 참 좋네요.”
“네. 조용하고요.”
하이든은 전과 다르지 않은 거리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최종 공판 이후 유우나가 납치됐었다는 기자들의 대대적인 보도로 렌에 대한 여론은 동정과 응원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물론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한 비판은 있었지만, 얼마 뒤 납치범의 정체가 밝혀짐에 따라 부정적인 여론은 금방 수그러들어 렌은 전과 같이 지낼 수 있었다. 하이든의 귀에 렌의 긴 한숨이 들리자, 하이든은 눈을 뜨고 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우나, 살이 붙어서 왔더라고요. 잘 챙겨 주신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건지…. 설마 납치범이 어벤지 씨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그런 일을 벌인 것도.”
“정말 몰랐습니까?”
“정말 몰랐어요. 유우나 걱정에 그쪽으로는 머리가 하나도 안 돌아갔거든요.”
“…그렇겠네요.”
렌의 말에 하이든은 잔을 들어올리고는 초콜릿 라떼를 마시며 렌의 눈을 피했다. 입 안에 달콤한 초콜릿 맛이 퍼지자 하이든의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졌다.
“이든 씨도 아시지 않습니까? 살인은 어떤 이유든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에요. 어벤지 씨가 피의자를 죽인 건 반드시 처벌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하이든이 고개를 들자, 렌은 예상했던 그대로의 말을 했다. 렌은 이런 사람이었다. 사석이든 공석이든 법을 준수하고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 인간미 없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아는 저도 똑같이 했을 것 같아요.”
뒤에 이어진 렌의 말에 하이든은 놀란 눈으로 렌을 쳐다보았다. 약간의 씁쓸함이 담긴 렌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하이든은 결국 목구멍까지 차오른 진실을 진득한 초콜릿 라떼와 함께 내려보냈다. 진실을 저 밑에 묻어버린 이상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어졌지만, 적어도 맛있는 것을 함께 나눴다는 사실에 하이든은 만족하기로 했다. 렌은 음료를 마시는 하이든을 바라보며 슬쩍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이든 씨. 어벤지 씨를 설득해 주셔서. 그리고 죄송해요.”
“이미 몇 번이나 하셨잖아요. 그만 하셔도 돼요.”
“아니예요. 몇 번을 해도 부족할 거예요. 정말… 정말 감사하고 죄송해요.”
그런 렌에 하이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배우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이라 생각하면서, 렌의 다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입에 담았다.
“…어벤지 씨의 변호를 맡으신다고요.”
“네, 유우나도 바라고요. 유괴 건에 대해서는 당신께서도 변호를 바라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따님을 모욕했으니,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이든의 말에 렌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며 말했다. 피해자의 유족이 요구로 벌어진 일에 렌이 죄책감을 가지는 듯하여, 하이든은 그 부분을 어떻게든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건….”
“그래도요.”
렌의 여전히 단호한 대답에 하이든은 반론을 멈췄다. 평균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하이든은 렌과의 간극을 아마 평생 채우지 못할 것이다. 하이든은 인간적이고 이론적이지만, 렌은 비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니 말이다. 하지만 하이든은 그 점이 좋았다. 평생을 이해하지 못해도, 자신과는 다른 관점의 세상을 알려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하이든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렌은 텅 빈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봐야 겠어요. 어벤지 씨와 접견 약속이 있어서.”
“아, 저도 가봐야 해요.”
“네, 그럼… 아, 이든 씨.”
렌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하이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이든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렌을 쳐다보자, 렌은 제법 밝게 웃으며 하이든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자주 만나요. 법정에서 말고, 밖에서.”
“…네, 좋아요. 자주 만나요. 밖에서.”
하이든은 잠시 멈칫하더니, 얼굴을 바라보며 마주 웃고는 렌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흔들었다. 웃으며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밖에서 자주 만나자고 말은 했지만, 아마 두 사람은 한동안 개인적으로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하이든도 다시 일이 많아질 터였고, 렌도 네스트라의 건을 비롯해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이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길을 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지금 당장은 멀어지지만, 이 둘의 목표는 같은 곳이었으므로 결국 크게 돌아 다시 같은 곳에서 마주할 터였다. 법정이라는 곳에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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